내가 하인애(河仁愛)를 만난 건 30년이 훨씬 지난 젊은 시절의 추억이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11월 27일, 친구 녀석의 직장이 명동 유네스코회관 건너편이었기에 퇴근할 때까지 두 시간을 땜질한 장소로 근처의 생맥주집 ‘로렐라이’로 들어갔다.

잔잔하게 깔리는 플루트 연주에 걸맞게 장식용 초가 아늑한 분위기 속에 가물거리는 테이블 곳곳엔 젊은 남녀의 걸쭉한 입쌀이 한창이었다. 고풍스럽게 장식된 무직박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앳되고 촉촉한 목소리가 시끌덤벙한 소란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왜 그런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슬퍼지나니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얘기가

내 마음에 자꾸만 메아리친다.

“이 시는 너무 유명한 독일 출생 하이네 시인의 ‘로렐라이’입니다. 바위 위에 앉아 저녁노을 속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근처를 지나가는 거룻배를 침몰시킨 인어 아가씨의 슬픈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곳 로렐라이에선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뱃속을 찌르는 생맥주가 여러분을 아련한 추억의 늪으로 침몰시킬 것입니다.”

초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가져온 생맥주로 깔깔한 입 안을 헹굴 때, 뮤직 박스 안에서 나온 그녀는 나의 건너편에 앉으며 비닐에 말아 감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선생님!”

장미꽃을 얼결에 받으며 불안한 눈초리를 팔랑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내 이름은 하인애예요. 독일 시인 하이네의 한글표기라 생각함 그 말이 정답이죠.”

그녀의 재잘거림은 계속되었다.

“사실은요, 오늘이 내 스물일곱 번째 생일이거든요. 내 몸을 따뜻하게 녹일 ‘난로’ 하나 없어 오늘밤 난로를 만들 생각이에요. 이 집에 스물일곱 번째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살 생각이거든요.”

그녀는 뮤직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청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이 시각이 두 사람의 교대시간인 것 같았다. 생맥주는 내가 시켰고 그녀는 열심히 마셔댔다. 그녀에게 있어 생맥주는 장거릴 달리는 자동차의 윤활유처럼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내게 하는 대범함을 갖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암 이상해요. 왜 기를 쓰고 땅 사고 건물을 지으려는지 모르겠어요. 땅을 이만큼 사서 ‘땅땅거리고 살고 싶어’ 환장한 거 같아요. 그쵸?”

삼십 분쯤 지나자 그녀는 좀 더 대담해졌다. 이따금 탁자 위를 탕탕 두드리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병정처럼 씩씩하게 두 팔도 휘저었다.

“나는 말에요. 명동 한복판에 내 동상을 세울 거예요. 저깃잖아요. 프랑스인가 하는 나라는 가장 번화한 곳에 시인의 무덤을 만든다잖아요. ‘번화가 속의 무덤’. 오호호호, 얼마나 멋있어요. 그치만 나는 시인이 아니거든요. ‘하이네’가 아니라 ‘하인애’에요. 그러니까 무덤 대신 동상을 만들 거예요. 괜찮겠죠.”

술 취한 나무처럼 휘청대던 그녀는 1000cc 생맥주를 통째로 엎어놓고 좋아라 깔깔거리더니 핸드백에서 주물로 부어 만든 5백원짜리 동전 크기의 물건을 꺼내놓았다.

“이게 뭔지 알아요? 마패에요, 마패!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가 변학도 시키에게 ‘암행어사 출두야!’ 했던 마패라니까요. 자기에게 이 마패를 줄께요. 이것만 있으믄 나를 맘대로 할 수 있어요. 옛날에 그랬잖아요. 마패를 꺼내들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마을 원님들이 발발 기었잖아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알겠죠?”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들은 하루가 멀다않고 만나 이마를 맞대었다. 그녀는 우리집 식구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다. 사촌 누이는 생맥주를 찐하게 사준 동지를 만난 탓에 그녀를 몹시 따랐다.

“내가 일하는 곳에만 오지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네 식구에겐 구겨진 내 모습 보여주기 싫어요.”

대부분 만날 장소는 그녀가 일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찐빵이나 만두 파는 가게로 정해서인지 그녀는 언제나 나의 청을 선선히 따라주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만나지 못할라치면 나는 거침없이 마패를 들이대며 폭군처럼 그녀의 약속을 바꿔버렸다.

즐거운 하루하루가 11월이 지나 12월에 들어와서는 조금씩 틈이 벌어졌다. 그녀는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사흘씩 집을 비우기가 예사였다.

“미스 하 말이죠. 군대 간 애인이 제대 하나 봐요. 여기도 내일까지만 나올 거예요.”

연락이 두절돼 찾아간 ‘로렐라이’에서 동료 종업원 말에 놀라기보다 나는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했던 말이 언뜻 귀가를 맴돌았다.

“사람들은 새를 차암 좋아해요. 새가 웃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우는 걸 좋아하죠. 조그만 새장에 가둬놓고 톡톡 건드리길 좋아해요. 왜 그럴까요? 새는 날아다니잖아요. 왜 한 나뭇가지에만 있어야 하죠? 나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이 나무 저 나무로 새가 옮겨 다녀야 하잖아요.”

넋두리쯤으로 들었던 그녀의 말을 새김질하며 나는 다음날 업무가 끝날 시간쯤 되어 ‘로렐라이’ 앞에서 기다렸다.

우울한 기분을 위로하듯 스산한 바람에 쫓겨가는 낙엽이 휘말리는 걸 부질없이 지켜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올챙이복을 입은 스포츠머리의 팔짱을 낀 채 재잘대며 나오던 그녀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여자에게 무언가를 되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트 안에 찔러 넣은 손끝에 느껴지는 장식용 마패를 꺼내자 동행한 사내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어, 내가 미스하에게 준 마패잖아!”

그 순간 하인애가 그것을 나꿔채며 바닥에 동댕이쳤다.

“뭐야, 눈 오는 밤에 춘향전 하는 거야 뭐야! 살다보니 별 이상한 짐승 다 보겠네. 우리 가요!”

‘로렐라이’를 허밍하는 사내 팔에 이끌려 그녀가 인파 속에 묻혀 가는 것이나, 아스팔트 위를 땍때구르 구르다 낙엽에 덮여가는 장식용 마패나 내 눈에 흐릿하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가만히 중얼거렸었다.

‘암행어사 출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