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간꾼의 안내로 일본에서 온 관리를 만난 화가는 문갑 옆에 놓인 ‘위기도소’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드시 그 물건 때문만은 아니었고 내기바둑 물품으로 제 모습을 자랑하는 <기보(棋譜)>라는 바둑책 역시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길 정도로 골동품 가치가 넉넉했다. 그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너울거렸다.

‘이 자가 어디서 이런 물건들을 구했을까. 하나같이 귀중품들이네.’

그곳까지 안내한 거간꾼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일본 관리는 호들갑스럽게 화가를 반겼다.

“참으로 반갑소이다. 바둑을 두는 일에 굳이 통성명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선생께서는 자신의 그림에 ‘명예’와 ‘명분’을 귀중히 여긴다는 말에 이렇듯 뵙자한 것입니다.

저의 거간꾼에게 들으시는 대로 저는 바둑이 7급 정도에 해당합니다. 그래도 배운 게 도적질이라 그 실력으로 이렇듯 내기바둑을 두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정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듣자하니 선생께서도 골동품 같은 걸 모으기에 힘쓴다 하니 이번에 저와 내기바둑을 두는 게 어떻습니까. 들으신 대로 내가 이기면 선생께선 그림을 한 점 내놓아야 하고, 선생이 이기시면 말씀드린 대로 가장 오래된 <기보>라는 책과 ‘위기도소’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내기에 응하시겠습니까?”

“그럴 생각으로 이곳에 왔지요.”

“그럼 내일 내기 바둑을 두십시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매서운 날씨였지만 다음날 ‘안락정(安樂亭)’이란 누각에 올라 바둑을 두게 되었다.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이 누각은 남산의 허리쯤에 있는 것으로 불어오는 북풍을 맞받을 수 있는 곳이기에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일기는 몹시 사나워 진눈깨비까지 날리고 보니 밖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정취는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그런데 내기 바둑이 시작할 즈음 엉뚱한 사단이 벌어졌다. 나이든 화가가 돌을 가리니 흑번이었는데 착점을 하고 나자 일본 관리는 벌컥 화를 냈다.

“아무리 바둑이라지만 위계질서는 있는 법이야. 특히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데 어찌 벼슬도 없는 일개 그림쟁이가 나와 마주앉아 바둑을 둔단 말인가.”

“?···.”

“자네가 첫점을 화점에 두었으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밖으로 나가 기다리게. 그리하였다가 내가 다음 수를 착점하면 그때 들어와서 바둑을 두게.”

엉겹결에 밖으로 쫓겨나 찬바람에 몸이 오그라드는 추위를 느끼는데 안에서 부르는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초반 포석에서 뭘 생각하거나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워낙 추위가 극심하다 보니 정자 안으로 들어가 언 몸을 녹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데 자정이 다 되도록 둔 수가 고작 다섯 수에 불과했다. 이건 죽기보다 더한 고역이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화가는 거간꾼을 불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보게, 나는 이런 바둑을 둬본 적이 없네. 아무리 관리라지만 바둑은 맞대면을 한 채 둬야지 어떻게 상대가 착점할 때까지 찬바람 맞으며 떨고 있으란 말인가. 이번 내기 바둑은 내가 진 것으로 할 테니 그 양반한테 원하는 게 무언지를 말하라 하게. 이제야 말이지만 지난날 자네에게 험하게 대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네만 그런 건 잊어버리고 이참에 날 도와주게. 자네가 애쓴 건 잊지 않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거간꾼은 한달음에 밖으로 모습을 감추더니 금방 돌아와 해결책을 내놓았다.

“내가 그 분을 찾아가 요모조모로 부탁을 드렸더니 자신은 바둑을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한답니다. 그리하는 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란 말에 내가 진땀을 뺐습니다. 그래도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애걸복걸한 탓에 그런 대로 양해를 구해 왔습니다.”

“그래 어쩌자는 건가?”

“나으리께서 내기 바둑을 지셨다고 원하는 그림이 무언가를 말씀하라 했더니 그 관리는 한참 생각하다 내게 이상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한 말?”

“예에. 그 관리는 산수화나 초상화가 아니라 화원 나으리의 따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따님의 엉덩이를 탁본(拓本)해 달라지 뭡니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