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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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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 (1)
2009-03-13     프린트스크랩
▲ 사진출처/ 월간바둑

 
이 칼럼은 월간『바둑』 500호(2009년 3월호) 특집으로 실은 글이다. 1호부터 500호가 만들어지기까지, 월간『바둑』 역대 편집장 5명이 각 100권씩 잘라 그 기간 기억에 남은 사건과 화제, 취재 뒷얘기 등을 썼다. 바둑을 매우 좋아하지 않더라도 관심을 갖고 즐기는 분이라면 바둑사는 물론 잡지계로도 기념비가 될만한 월간『바둑』 500호를 한권쯤 소장하시길 권한다.

<월간『바둑』 500호(2009년 3월호) 내용보기><== 여기클릭


월간『바둑』 기자로 입사한 것이 88년 10월. 그러니까 257호째부터 승선해 2002년 2월호(415호)로 하선하기까지 권수로 159권, 햇수로 15년,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한국바둑의 황금기에 19로 종군기자로 뛴 셈이니 행복한 축에 속한다.

입사하자마자 취재한 화제의 현장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1회 응씨배 준결승전이었다. 이 대국에서 린하이펑 九단을 2-0으로 꺾은 조훈현 九단은 다음해 5월 싱가포르에서 녜웨이핑 九단마저 제압하고 초대 바둑황제에 올랐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한국바둑은 세계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단숨에 세계최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으로부터 한갓 바둑 변방국으로 취급받으며 수모를 당하던 우리 바둑이 속력행마를 앞세운 선봉장 조훈현과 그 뒤를 받치는 이창호, 이세돌의 눈부신 약진이 이어졌던 2000년대 초반까지, 모든 영화를 월간『바둑』지 기자로 오롯이 보았으니 어찌 행운이 아닐손가.

지령(誌齡) 500호를 맞아 월간『바둑』 편집부로부터 청탁받은 원고가 지령 301호~400호 사이의 이야기다. 이 시기에 월간『바둑』을 진두지휘한 데스크(15대 편집장)로서 기억에 남는 사건과 화제, 에피소드를 녹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지령 301호인 92년 8월호부터 2000년 11월호(400호)까지의 기간인데, 그렇다면 이 기간의 ‘키워드'는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조훈현-이창호 사제대결, 이 한마디로 대변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90년대 초반 ‘4인방 시절'이 있기는 했다. 이들이 돌아가며 세계대회를 석권하면서 한국바둑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결과론으로 볼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이 사제를 부조(浮彫)하는(같은 시각으로, 사제대결 또한 최후의 승자인 이창호를 비추기 위한) 배경이었다. 승부세계는 승자 독식의 정글이므로. 요즘 방방 날고 있는 이세돌 九단의 등장은 2000년 이후의 일이니 90년대를 점철한 조훈현-이창호 두 사람의 ‘헤게모니 쟁탈'이 지령 301호~400호를 수놓은 뼈대일 수밖에 없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는 사제대결사(史)를 풀어보되 ‘등장하는' 제자보다는 ‘퇴장하는' 스승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런데 조-이 사제대결 이야기를 풀어놓자면 이창호가 도전무대에 전면 등장하고 사제의 어색한 조우가 시작된 89~91년 3년간의 흐름부터 짚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편집부에서 그어준 지령 301호의 경계를 살짝 넘어 타임머신 시점을  3년 더 앞에 맞추고 시간여행에 나선다.

천재론
바둑기자이다 보니 바둑팬으로부터 바둑동네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데 이 중 빈번한 질문  하나가 “누구를 최고의 천재기사로 생각하느냐?”는 물음이다.
콧김을 쐴 수 있을 만큼 지척에서 다년간 그들을 대해온 기자의 주관적 견해를 묻는 것인데, 사석에서 주고받는 가벼운 호사가적 이야기이기는 해도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자칫 내 답변이 한두 다리를 건너면 바둑계의 정설인 양 변질될까봐서였다.
하지만 오늘 이 지면은 정색을 하고 쓰는 정사가 아니라 과거를 회고하며 추억담을 늘어놓는 야사 같은 성격이니, 이왕 얘기를 꺼낸 김에 ‘주관적 견해'임을 전제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천재기사'를 말해 보련다.

‘오직 이것뿐'이라는 절대명제로 규정지을 수 있는 세상 이치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지고지순하게 여기는 사랑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을 수 있듯이 저마다 규정짓는 천재론도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바흐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브람스도 천재로 추앙받고 조치훈도 조훈현도 이창호도 이세돌도 천재로서 감탄한다. 한때 조훈현-이창호의 천재 유형을 논할 때 조훈현은 백도(白道)요 이창호는 흑도(黑道)라 표현한 적이 있다. 조훈현 九단의 재기는 현란한 칼춤처럼(그것도 쌍칼이다) 번뜩이고 날카로운 데 비해 밋밋하고 뭉툭해 보이는 이창호 九단의 기재는 ‘둔도(鈍刀)'에 비유하며 ‘무딘 날의 명검'이라 칭송했다.

조훈현 九단이 모차르트 같다면 이창호 九단은 베토벤을 닮았다. 화려한 음색, 귀에 착착 감기는 모차르트 선율에 비하면 베토벤의 화음은 어둡고 무거우며 사색적이다. 작곡 과정도 완벽을 추구하며 쓰고 고치기를 거듭한 베토벤에 견주면 모차르트는 일필휘지였다.

모차르트는 14 때 로마 바티칸 궁전 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연주되는 ‘미제레제'를 듣고 돌아와 그대로 악보에 옮겨 적었는데 원 악보와 거의 일치해 바티칸을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9성부의 2중합창인 이 곡은 바티칸에서 외부에 악보를 유출하지 않는 비곡(秘曲)으로 성당에서만 연주되던 곡이었는데 모차르트의 채보(採譜)로 부득이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 종종 인용하는 진부한 일화이지만 이것이 천재론이 난립하는 시대에 내가 생각하는 천재의 모습이다.

바둑사에 이러한 천재적 면모와 겹쳐지는 기사로 아직까지 우칭위안 九단과 조훈현 九단 외는 달리 떠오르는 인물이 아직 내겐 없다.

음악사에서 베토벤을 말할 때는 ‘천재'보다는 ‘위대하다'는 레토릭을 많이 쓴다. 음악의 정석과도 같은 소나타 형식은 바흐로 대표되는 바로크 악파에서 고전파인 하이든-모차르트를 거쳐 베토벤에 이르러 완벽하게 다듬어졌다. 즉 고전파의 완성은 베토벤이 이루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선배들의 음악을 흡수하여 고전음악을 완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도로써 낭만파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즉 고전파의 완성과 동시에 낭만파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베토벤은 위대하다.

이창호 九단이 그렇다. 오청원과 조훈현 시대의 바둑에선 귀와 변과 포석과 중반전투는 정복했으되 ‘중앙'과 ‘두터움' ‘끝내기'에 대한 윤곽은 여전히 실루엣이었다. 이것에 비로소 눈을 뜨고 정확히 계산(형세판단)해낸 것이 ‘종반의 이창호'였고, 이때부터 바둑사의 사조(思潮)는 새롭게 이창호 이전과 이후로 구별되었다.

고전파의 완성과 낭만파의 시작을 연 베토벤처럼 나는 이창호를 위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조훈현만큼 천재적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노(NO)”다. 모차르트가 선천적인 천재라면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후천적 노력형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창호도 그런 유형의 천재로 보고 싶다.

이러한 까닭에 동시대를 살면서 곁에서 승부호흡을 지켜본 기사 가운데 진정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기꺼이, 난 조훈현 九단을 꼽는다.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숱한 기록과 일화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가 이토록 치열하고, 승부사의 라이프 사이클의 변곡점이 날로 짧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50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이창호, 이세돌 같은 후학들과 파이팅 넘치는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과연 이창호 九단이, 이세돌 九단이 20년~30년 후 조훈현 九단만큼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을까? 내기를 하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힘들다”에 걸겠다.

1989년 11월 1일 두어진 33기 국수전 도전3국 에서도 제자 이창호 三단은 백 반집승을 거뒀다. 스승 조훈현 九단이 다음 도전4국을 이겨 3-1로 타이틀을 방어했으나 이때의 반집승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소년 이창호는 이미 반집을 읽어내는 눈을 갖추고 있었다.

반집의 알레고리
예술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에서도 보통 스승은 전성기를 지난 상태에서 제자를 받아 가르치기 때문에 승부를 직접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바둑도 그랬다. 그런데 조훈현 九단은 한창 정상급 토너먼트 승부사로 활동할 때인 33세에 제자를 들였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런데 더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진 건 열서너 살밖에 안된 제자가 정상급 기사로 발돋움한 웃지도 울지도 못할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처음 졌을 때 “충격과 기쁨이 동시에 왔다”고 말했지만 좀 자극적으로 표현한다면 하극상(?)과도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승부사로서 감내해야 할 슬픈 운명을 느꼈을 것이다. 처음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일 때 어떻게 생각했을까.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 씨가 조훈현 九단과 나눈 인터뷰(중앙일보) 한 대목이다.

이창호는 처음부터 재목이라고 생각하고 내제자로 받아들이신 건가요?

“아니요. 처음에는 ‘계륵'으로 생각했어요. 뭔가 아쉬운,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그런 정도로 보였어요. 한데 이렇게 잘할 줄 몰랐죠. 어린 나이에 성실했어요. 창호는 ‘안의 천재'가 아니라 밖에서 ‘보이는 천재'죠.”

안의 천재가 아니라 보이는 부분이 천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능력만큼의 성실성 같은 것이죠. 창호는 100번 중에 한번이라도 역전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판을 크게 이길 수 있어도 그 수를 안 둬요. 창호에게 ‘왜 그 수를 안 뒀느냐'고 하면 ‘자기가 가는 길로 가면 100번 중의 100번을 반집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답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스승과 제자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2-0으로 뒤지다 89년 1월 12일 도전3국에서 첫승을 올려 놀라게 했는데, 결과가 299수 끝 흑 반집승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반집패의 불운은 승부처마다 악몽으로 나타나 두고두고 스승을 괴롭힌다.

조훈현시대의 개막은 최고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병역 문제로 72년 일본에서 귀국한 조훈현 九단이 74년 부산일보가 주최하는 최고위전을 접수했을 때 “드디어 조훈현이 한강다리를 건넜다”고 보도했다. 부산 기전을 발판으로 서울(중앙기전)로 입성하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이후 조九단은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한국바둑계를 휘저으며 80년(9관왕), 82년(10관왕), 86년(11관왕) 세 차례에 걸쳐 전관왕에 올랐다.

이창호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개막축포도 최고위전이었다. 역사란 공교로운 것이어서 이처럼 짐짓 우연을 가장한 채 다가온다. 이른바 ‘백년전쟁'으로 불린 사제대결도 바로 이 최고위전을 시발로 펼쳐졌다.

88년 12월말 13세의 소년기사 이창호 三단이 최고위전에 이어 패왕전 도전자로 등장했다. 스승의 숙적 서봉수 九단을 뉘면서 딴 도전권이라 더욱 놀라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개 타이틀 도전은 실패로 끝났으나 도전기에서 스승에게 첫 승리를 거둔 89년 1월 12일의 28기 최고위전 도전3국 결과는 흑 반집승이었다.

처음 이긴 판이 반집 승부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집승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들 운이 좋아 한판 건졌다는 눈치가 역력했고 제자의 일패도지(一敗塗地)에 세대교체는 당분간 요원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년기사에게 내리 6판을 깨진 서봉수 九단, 한 사람만큼은 예사로이 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소년의 형세판단은 반집을 읽어낼 정도로 정교했고 계산력은 강했다. 이후 결정적인 대목에서 번번이 반집을 이겨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89년 7월 소년은 최연소 나이(14세)로 KBS바둑왕전(대 김수장)을 우승했다. 비록 속기전이고 선수권전이기는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스승은 “악!”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두 달 뒤 89년 가을(9월), 제자는 세번째 도전장(33기 국수전)을 내밀더니 12월 지난해에 이어 재차 최고위전에 도전장을 던졌다. 작년하고 또 달랐고 뭔가 심상치 않았다.

89년 김수장 7단을 2-0으로 꺾고 14세 최연소 나이로 타이틀(KBS바둑왕전) 보유자가 돼 세상을 놀라게 한 이창호.

일단 국수전 도전5번기는 스승이 3-1로 이겼다. 제자의 세번 연속 도전 실패. 허나 이번에도 승점을 거둔 판(도전3국)은 반집승이었다. 그러고는 기어이, 놀랍게도 연출된 파천황(破天荒)의 사건. 90년 2월 2일 29기 최고위전 최종국에서 딱 반집을 남기며 3-2로 제자가 스승을 이기고 타이틀을 뺏은 것이다. 당시 월간『바둑』 이 뽑은 헤드라인은 “이창호, 최고위부터 시작하다”였고 “이창호는 바둑역사상 최강의 10대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장하고도 무서운 ‘사건'이다. 이四단의 타이틀 폭격은 이제부터이다.”라고 예견했다.

폭격도 융단폭격이었다. 90년 2월 최고위(3-2 승)로 봇물을 튼 이창호는 이 해 국수전(3-0 승) 하나를 더 접수해 단숨에 2관왕에 오른 데 이어 91년 최고위전(3-2 승, 이번엔 2연패 후 3연승 쇼였고 첫 타이틀 방어 기록이었다)을 방어한 후 대왕전(3-1 승), 왕위전(4-3 승), 명인전(3-0 승) 등 3개의 타이틀을 또다시 접수, 그때까지 갖고 있던 제왕전, 박카스배와 함께 순식간에 7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제자가 스승을 자꾸 이기는 사태가 발생하자 사제가 한 집에서 동거하기가 어색해졌고 91년 3월초 중학졸업과 함께 이창호는 독립했다.)

와기(臥棋)

반대로 스승의 입지는 4관왕(91년)으로 좁혀졌다. 연전연패하던 이 시절 조훈현 九단의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났고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져 갔다. 체력적인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고 종국 무렵에는 사진기자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도 아랑곳 않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했다. 아니 저절로 드러누워졌다.

이름하여 와기(臥棋).

한 시대를 마감하는 거장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기자들이 미화하여 붙여준 제목이었다. 어찌나 급격한 세대교체였던지 바둑계는 소년기사를 일인자로 맞는 기쁨보다는 너무 빠른 대혁명을 보는 슬픔이 커 보이는 듯했다.

아래 사진은 91년 8월 20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종로구 관철동 소재)에서 벌어졌던 22기 명인전 도전5번기 3국의 종국 장면이다. 3-0 스트레이트 패배. 전통의 국수에 이어 명인마저 스트레이트 패배로 넘어갔다. 월간『바둑』 91년 10월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말 이창호가 강한 것인가, 아님 조훈현의 퇴조가 너무 급격한 것인가?”

이긴 자도 진 자도 침울한 대국현장. 22기 명인전 도전3국. 3-0으로 이창호가 이겼다. 스승은 종반에 들어서면 속수무책으로 급격히 무너지곤 했다.

이 와기 사진에 얽힌 에피소드는 월간『바둑』 2000년 1월호 <아듀, 20세기! 이 한장의 사진>에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4명의 국수가 모두 자리하고 있다. 양 대국자 말고도 전면에 보이는 조남철 九단, 그리고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으나 앵글 이 편에 김인 九단이 함께 복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김인 九단이 슬쩍슬쩍 어깨를 들이밀며 조훈현 九단을 찍어대는 카메라의 렌즈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김인 九단의 훼방은 우연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진이 잡지에 실리고 난 후 작은 사건 하나를 겪고 나서야 그때 김인 九단의 행위가 어쩌면 의도적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이 와기 사진보다 더 리얼하게 세대교체의 현장을, 사제의 명암을 달리 설명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잡지에 실었다. 그런데 잡지가 판매되고 며칠 뒤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편집실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편집장이 뉘기여?”  냅다 호통부터 치는 것이었다.

“편집장이 언놈이기에 이런 사진을 잡지에 떡허니 올린겨? 언놈이 이 따위 사진을 찍었어?”

노발대발 언성의 높낮이에 따라 지팡이도 거의 지휘봉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지라 자칫 저 지팡이에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잔뜩 몸을 사려야 했다.

노인장의 말인즉슨, 바둑은 품위를 지키고 품격을 높이 사는 예도이거늘 이에 앞장서야 할 바둑 정론지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명인의 드러누운 사진을,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화보 첫 페이지에 실어 이미지를 훼손하였기에 의분을 못 참고 걸음했다는 것이다.

아아, 그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구나.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김인 九단이 슬쩍슬쩍 렌즈를 가로막은 것이로구나. 왕(王) 사자가 쓰러져 상처를 핥는 모습은 찍어 남길 것이 못된다고. 그 또한 한 시절 일인자로 군림하다 허망하게 승부의 뒤안길로 나앉은 선경험자가 아닌가. 그렇게 한 노(老) 독자에게 욕을 보긴 했으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으로 뭘 몰랐기에 과감히 찍어 인쇄에 걸었던 이 한장의 사진은, 그러나 지금은 20세기말 한국바둑계가 바둑황제 조훈현 九단에서 바둑황태자 이창호 九단으로 왕권이 이양되는 흐름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압축파일로 남았다.

땡曺 타임
90년 2관왕에서 91년 7관왕으로 껑충 뛰며 실질적인 1인자에 등극한 소년 이창호는 92년에는 8관왕, 93년에는 국제기전인 동양증권배를 2연패하며 12관왕에까지 올랐다. 이 해 이창호 六단은 무려 12회의 타이틀전을 치르며 11승 1패의 경이적인 성적으로 전관왕 목전까지 치달았다. 국제대회에서 유창혁 六단이 후지쯔배(92년)를, 서봉수 九단이 응씨배(93년)를 석권하여 관성적으로 ‘4인방 시대'로 명명되기는 했으나 유-서 두 사람은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이후의 흐름은 조훈현 九단만이 버겁게 고군분투할 뿐 이창호 독주체제가 굳혀진 시기였다.

93년 말부터 94년 초까지 조九단은 제자와 5개 기전에서 도합 27번기의 대회전을 벌였으나 대왕 하나를 빼앗고 나머지 타이틀전에서는 참패(종합전적 5승 13패)했다. 이 대회전에서 이九단은 압승의 전리품으로 최후의 미답지였던 기왕전(94년 4월)을 챙기며 국내 16개 기전을 한번 이상씩 우승하는 사이클링히트를 달성했다. 13관왕.

5개 기전에서 벌이는 전대미문의 사제도전기는 94년 말에서 95년 초에도 25번기로 재현되었다. 절치부심 1년 만에 복수를 다짐한 조九단이었으나 이번에도 반집 악몽이 재연되었다. 4개 기전에서 주요 고비마다 골고루 반집패를 당하면서 추격의 예봉이 꺾였다.

결과는 지난해보다 더 참혹했다.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5전 전패(종합전적 5승 13패). 그나마 마지막으로 두르고 있던 대왕 타이틀(2월)마저 빼앗겨 20년 만에 국내기전 무관으로 떨어지는 수모까지 겪었다. 93~95년 3년에 걸쳐 벌인 27번기, 25번기는 사제대결의 분수령이자 최대 격전지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문제는 ‘이겨야 본전, 지면 망신'인 쫓기는 자의 심리(더군다나 스승이다)와 체력이었다. 95년 5월 수덕사에서 벌어진 왕위전 도전7번기 1국(대 유창혁)에서 밤 9시 무렵에 접어들면서 실수를 연발하는 조훈현 九단을 보면서 김수영 六단이 ‘땡조(曺) 타임'이 시작되었다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역시 오늘도 조국수께서 ‘밤 9시 징크스'를 깨지 못했군요. 제자 이창호와의 대국에서도 10판 중 9판을 유리하게 이끌다가도 9시 무렵만 되면 마치 딴사람처럼 어이없이 무너지거든요. 체력 탓입니다. 40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슬픔입니다.”

땡조 타임은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면 영락없이 전두환 전 대통령 소식으로 시작하던 9시 뉴스를 빗댄 ‘땡全 뉴스'에서 따온 신조어다.

‘국수'는  한국바둑의 대명사다. 15세 국수의 탄생에 바둑계가 경악한 이유다. 제34기 국수전 도전5번기 최종국 장면.

돌이켜보면 스승과 제자의 격차는 딱 반집이었고 이는 세월의 무게였다. 스승과 제자의 통산전적은 188승 119패로 제자가 앞서 있다. 이 가운데 조九단의 반집승이 5번인데 비해 이九단은 20번이나 된다.

도전기와 결승전 통산전적은 67차례 싸워 48승 19패(총 대국전적 162승 97패)로 이九단이 앞섰는데 도전무대에서 조九단의 반집승은 4번에 그쳤지만 이九단은 무려 17번의 반집승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도전기는 모두 53차례 치러 39승 14패, 결승전은 14차례 9승 5패를 기록했다.)


[장면1] 제7기 기성전 도전7번기 5국
이창호 九단 (기성)
조훈현 九단 (도전자)

<1998. 2. 9, 268수 끝, 백 반집승>

<장면1>은 조훈현 九단이 스스로 ‘5천만원짜리 반집'이라며 무척 아파했던 한 판이다. 98년 당시 기성전의 우승상금이 1천800만원이었으니 만약 이 판을 이기고 기성에 올랐다면 다음해 도전기에 타이틀 보유자로서 자동출전하게 될 것이고 그때의 상금에 대국료까지 족히 5천만원쯤의 가치를 지닌 판이었다는 얘기다. 그만큼 뼈아팠다는 다른 표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반 2연승으로 기선제압을 해놓고도 추격을 허용하여 2-3의 대역전극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종 5국은 반집패. 결정적일 때마다 번번이 반집이라니. 거듭되는 운명의 장난 앞에 조九단도 어이없었던지 공배를 메우고 계가를 하는 동안 허탈웃음을 연신 지어 보였고, 이 소식을 실은 월간『바둑』 98년 3월호는 ‘차라리 웃고만 반집'이란 헤드라인을 붙였다. 이때까지 사제 도전기에서 2연패 후 3연승 기록은 5번 연출되었고 이 중 4번이 제자의 뒤집기 승이었다.

조九단은 나중에 이 판을 검토하며 <장면1>의 흑1을 패착으로 지목했다. 백4가 선수여서(흑5를 두지 않으면 백A의 끊음이 성립된다) 후수가 되는 바람에 백에게 6의 요처를 빼앗겼다. 그리고 흑1은 그 자체로 6의 곳보다 작았다.


“허참, 그다지 어려운 곳도 아니었는데….”

조九단의 탄식이 동굴 속의 울림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조훈현과의 대화, 이광구 저 참조>

 
[1도]

<1도> 흑1로 두어야 했다. 백이 2로 받아주면 흑3이 다음으로 크다. 다음 백이 안받으면 흑A로 찌르고 백B 교환하는 것이 선수 2집 끝내기. 나중에 공배가 메워지면 백은 C에 한수 더 놓아야 한다.

 
 
[2도]

만약 <2도> 흑1에 백이 손을 빼면 흑3,5로 두는 것이 나중 <3도> 흑1의 치중수도 있어 어떻게든 반집은 이겼을 것이라고 조九단은 크게 아쉬워했다.

 
 
[3도]

<3도> 흑1의 치중에 백A의 패는 흑이 팻감이 많다. 따라서 백은 B로 잇고 나중에 C의 곳을 한수 더 보강해야 한다.

‘땡조 뉴스'라는 우스갯소리에서 보듯 나이에 따른 체력과 집중력의 저하가 원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조훈현 九단은 화염방사기와 같은 초중반에 견줘 종반이 약했다. 이것이 아킬레스건이었다. 서봉수나 도전5강의 도전을 받던 시절엔 실력 차이가 있어 눈터지는 반집싸움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었거니와 종반 승부로 가더라도 당시는 전반적으로 계산 수준이 약했을 때이므로 이창호 九단에게 당한 것처럼 번번이 덜미를 잡히는 따위의 낭패를 겪을 일이 그리 없었다. 그러나 선배들에 비해 계산바둑에 철두철미한 유창혁, 이창호과 같은 후배들은 달랐다. 이창호는 슈퍼컴이었다. <계속>



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 (2)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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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  2009-03-13 오후 9:37:3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명문 명글이란 이런것 과연 ,  
후지산 |  2009-03-13 오후 9:38:0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조훈현 사범의 폼은 조금 그러네요^^  
斯文亂賊 |  2009-03-14 오전 12:12:3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천재소년으로 세간에 알려진 송유근 군의 부친이 인터뷰에서 한 얘기 한 대목에서 발췌..
[영재교육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에 아버지 송수진(50) 씨는 바둑 얘기부터 꺼냈다. 조훈현 국수(國手)가 없었더라면 바둑영재였던 이창호 9단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겠냐는얘기였다.] -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9.3.3.-  
달선공팔 |  2009-03-14 오전 11:19:5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제자 이창호와의 대국에서도 10판 중 9판을 유리하게 이끌다가도 9시 무렵만 되면 마치 딴사람처럼 어이없이 무너지거든요. 체력 탓입니다. 40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슬픔입니다.>

믕... 슬퍼지는군요
 
달선공팔 |  2009-03-14 오전 11:29:4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을 매우 좋아하지 않더라도 관심을 갖고 즐기는 분이라면 바둑사는 물론 잡지계로도 기념비가 될만한 월간『바둑』 500호를 한권쯤 소장하시길 권한다.>

월간바둑 500호라...벌써 그리 되었남요?

축!~ 하~ 합!~ 니~! 다.~!~~~!!~~!~!~ (...^.^...)

세권 사서 예전 직장 동료 두 분 형님께 한 권씩 선물해야겟네요. *^^*  
혈의광마 |  2009-03-14 오후 7:53: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地上最强의 師弟  
고수장사 |  2009-03-16 오전 12:55:5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무어라고 해도 천재는 조국수여!!!!!!!!!!!!!!!!!!!  
autip |  2009-03-16 오후 8:23:4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옛날 생각이 나네요.. 초중반까지 제자를 가지고 놀다가 막판에 집중력 저하, 계산력의 약점으로 계속 역전패 당하던... 그건 역시 세월의 무게이겠죠..
최고의 천재는 조훈현 국수이죠.. 그건 두말 할 나위 없는 거고.. 그가 계산력을 갖출 필요조차 없었던 젊은 시절이 나중에 야속할 따름일겁니다. 일본에 있었다면 계산력은 좀 더 강해졌을거고요.. 오청원 이창호가 인정한 유일한 천재이니.. 정말 그는 최고였습니다.^^  
youngpan |  2009-03-17 오후 6:07: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세월의 무게만큼 무거운게 있을까요..  
삼소파도 |  2009-03-19 오전 10:15:4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자객행 |  2009-03-19 오전 11:53:1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즐독입니다. 월간바둑에서도 읽었네요^^  
선비만석 |  2009-03-22 오전 9:20: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역시역시..............정 이사님글은 소중한 글....  
asrgme |  2009-03-25 오전 12:27: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슈퍼컴퓨터는 96년도에 다께미야일본명인이 이창호사범님께 한말인데요...^^* 다께미야명인도 큰충격에 빠져서~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온말......인간이아니라 슈퍼컴퓨터이다라구요...  
waumae |  2009-03-31 오전 2:03:3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두 사람이 함께한 것은 우리 시대의 홍복입니다. 두 사람 모두 천재입니다. 단지 조9단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무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창호 9단이나 이세돌 9단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참 잘 쓴 글을 읽었습니다.  
waumae |  2009-03-31 오전 2:11:2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창호 9단이 워낙 어린 나이에 특출한 성적을 거두다보니 지금 설흔이 한참 넘은 나이임에도 이창호, 이창호 라고 쉽게 부르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꼭 이창호 9단이라거나 이국수 이렇게 불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고로 저는 환갑이 한참 지난 나이입니다. 조국수가 아직도 할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하고싶습니다. 따옴표도 금지어라니 우습군요.  
은명 |  2009-04-03 오후 5:28:0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쓰잘데 없고 때늦은 태클같지만.. 유창혁사범이 후지쯔배 우승은 93년.9월경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누가 확인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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