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가 진고개 기원을 들러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기보를 구입한 1894년 6월의 한양 진고개 일대는 하나의 개화된 세상이었다. 이곳에는 기원은 물론 사진관, 양복점, 이발소, 당구장 등이 개장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기원이 있었던 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사진관은 1894년에 진고개에 3곳이나 있었던 기록이 '경성발달사'(1912년 발간)에 보인다. 독립신문 1899년 1월6일자 광고란에는 진고개 사진관의 광고가 실려 있다. 사진관의 간판 명칭은 '옥천당'이다.

그동안 사진 한 벌에 네 장씩 준 것을 물가 고등(양등)으로 세 장씩 주게 된 것을 혜량하옵고 군자(君子)들께선 찾아주옵시길.  -독립신문

'하원사차량'은 진고개에 당구장을 개업하고 영업을 개시하지만 당시로는 너무도 혁신적인 당구장 영업은 잘 되지 않았던 듯하다. 하원사차량은 당구장 영업보다는 개인 취미이자 특기였던 바둑과 도박으로 진고개의 명사(?)가 된다. 그의 뒤에는 일본 영사관 직원인 고쿠보쇼타로(國分象太郞, 1861-1921)가 있었다.

고쿠보는 대마도 출신으로 1876년 부산에 들어와 초량왜관에서 조선어를 습득, 1888년에 '일본경성영사관' 통역으로 취업 영사관 다케조에부터 이노우, 스기므라, 가토, 하야시곤스께를 거칠 정도로 조선통이었다. 고쿠보는 바둑광으로 일본 거류민단의 바둑인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하원차량이다.

6월10일. 흐리고 비.
한양에서는 난리도 별무신통이다. 큰 난이 아니어 다행이다. 처와 제중원에 다시 들러 진맥을 보고 집으로 길을 잡았다. 오빈역 주막에서 하루 잤다.

6월11일. 비.
비가 조금 갤 때를 택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행장이 훔뻑 젖었다. 내일부터 상점을 열어야겠다. 한양길에 모두 2백 냥을 썼다. 술을 마시고 잤다.

고쿠보쇼타로는 통역관이었지만 나름 조선인들에게 신망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와 연결된 조선인들이 이인직, 오세창, 유병문 등 쟁쟁한 사람들이고 이들 모두는 바둑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인직은 하라 3단과 기보를 남긴 사람이고 오세창은 손수 기보'를 편찬, 출판한 사람이다. 유병문은 조선 명사들 중 바둑 기력이 가장 출중했던 사람 중 한명이다.

고쿠보는 훗날 이토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19년 이토의 수원 여름휴가에 수행하는데 이토의 바둑상대를 그가 할 정도였다. 하원사차량은 눈치가 빠르고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으로 고쿠보의 후원을 얻어 조선인들의 거친 도박성을 사업으로 만들어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황혼으로 저물어가는 나라의 한쪽 구석에서 불야성의 도박장이 흥행한 것도 이해가 된다.

빛도 희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마지막 한탕을 노리고 올인하는 부나비는 삼류인간들만의 속성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바둑프로 '하라' '가리가네준이찌' 등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고쿠보 같은 실력자들의 힘을 업고 날뛰던 하원사차량의 손짓이었다.

1894년 일본 바둑계는 사분오열이었다. 슈에이와 슈호의 갈등으로 알려진 방원사의 분열이 1986년 고토쇼지로(後藤象二郞)의 중재로 봉합되었다고는 하나 슈에이가 사상회(四象會)를 만들면서 대여섯 개의 바둑단체가 설립-갈등-소멸하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기사들도 각자 생도지망을 개척해야할 때였다. 그들 중 일부가 조선을 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