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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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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2)
2013-12-07 조회 8048    프린트스크랩
▲ 영화 '소녀' 포스터.

          

꿈이 계속 이어졌다.

 

후드를 뒤집어 쓴 범인이 고개를 돌렸다. 손바닥만한플래시 불빛에 범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였다. 호철의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권총을 움켜쥔 손이 떨렸다. 소녀는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호철을 바라보았다. 길이를 잴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무덤 속 같은 침묵이었다. 그나마 아득하게 들려오는 빗소리가 살아있음을증명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호철의 입은 본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움쩍도 안했다. 단지 방아쇠에 걸려 있는 검지손가락만이 호철의 입을 대신할 뿐이다. 방아쇠를당기면 끝이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검지손가락은 방아쇠에걸린 채 꿈쩍을 안했다.

 

침묵을 깨트린 건 소녀였다. 기계음 같은소녀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나여요. 내가 살인범이여요. 방아쇠를 당겨요. 쏘세요.”


-
그래. 쏜다. 그 가증스런 얼굴에 총알을 박아주겠어.

 

호철은 가늠쇠 위에 소녀의 얼굴을 올렸다. 방아쇠만당기면 된다. 그럼 끝이다. 쏜다. 쏘고야만다.

 

“뭘 망설이세요. 이제 끝내요. 쏘세요. 방아쇠를 당겨요.”

 

소녀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면서 들려왔다.

 

권총을 쥔 손이 떨리면서 가늠쇠 위에 올려진 소녀의 얼굴이 흔들렸다.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쏘지 못할 거여요. 내가 이겼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비웃음처럼 들렸다.

 

그 순간 본드로 붙인 듯이 움쩍도 못한 호철의 입이 떨어지면서 절규했다.


“이  살인마!!”

 

절규와 함께 호철은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도 범인을 잡나봐.”

 

눈앞에 지현이 보였다. 지현이 침대에 걸터앉아호철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기분 어때?”

 

“방아쇠를당기지... 못했어.”

 

지현의 말에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호철이다.

 

“무슨 말이야.”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호철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일어나 씻어. 속 쓰릴 것 같아서 북어국끓여 놨어.”

 

지현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씻을 때 손 조심하고. 물 들어가면 덧날지도몰라.”

 

지현의 말에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보는 호철이다. 손에붕대가 감겨져 있다. 비로소 어제 술자리에서 소주잔을 깨트린 것이 생각난다. 그것과 함께 지현과 잠자리한 것이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격렬한섹스였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진수성찬이었다. 호철의기억으로는 자신의 생일날도 이런 상은 받아보지 못했다. 이 이른 아침에 어떻게 이런 음식을 장만했는지궁금한 호철이다.

 

“이런 아침에 이런 건 어떻게 만든 거야. 재료도없을 텐데...”

 

“부지런 좀 떨었지. 조금만 가면 아침일찍 문여는 장이 있거든.”

 

피곤할 텐데도 지현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쓸데없이...그냥 국만 끓여도 될 텐데...”

 

“바보.”

 

바보란 한 단어로 지현은 수십, 수백 마디로표현할수 없는 속마음을 대신한다. 그것에 호철의 마음이 뭉클해진다.

 

“먹어.”

 

호철의 밥 위에 불고기 한 점을 올리는 지현이다.

 

“고마워.”

 

밥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호철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그 작은 말 한마디에 지현은 하늘을 나는 듯이 행복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택시기사는 이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였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소변을 참고 있는 것이 벌써 두 시간째다. 그동안 조금씩 찔끔찔끔 싸면서 참고 있었지만 이젠 그나마도 힘들었다. 조금만더 참으면 방광이 터질지도 모른다. 기사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뒷좌석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저...저기 손님. 이젠 말이죠. 정말이지 못 참겠습니다. 쌀 것 같다구요. 금방 다녀올게요.1, 아니 30초면 됩니다. 금방 싸고 올게요.”

 

기사의 울먹이는 말에도 뒷좌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 앞 유리창 밖으로 오피스텔이 보였다. 출근 시간인 오피스텔에서는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무표정함에 기사는 혀를 내둘렀다. 여자는 겨우해 봐야 스무., 아니그보다 어려보였다. 그런 어린 여자가 지독한.걸로 따지면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사람보다 더했다. 여자는 어제 아침 택시를 탄 이후로 꼼짝을 안했다.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람이라면 자연적인생리현상이란 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 화장실 한번 가지 않았다. 도대체무슨 사연이 저 어린 여자를 저렇게 지독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여자는 어제 아침 택시를 하루 임대했다. 하루임대료가 자그만치 100만원이었다. 여자는 은평구에 있는서울병원으로 가자고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서울병원은 아수라장이었다. 택시는 병원 밖 도로에 주차했다.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네 시간을 기다린 끝에 여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나왔다. 남자와 여자였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보였다.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두 사람은 다 낡아빠진 지프차를타고 불광동의 낙원이란 술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세 시간을 기다렸다. 여자가 잔뜩 취한 남자를 부축하고 오피스텔로 들어간 건 저녁 8시가넘어서였다.

 

그 시간에 오피스텔에 들어간 두 사람이 금방 나올 리 만무다. 그런데 이 어린 여자는 시선을 오피스텔에서 단 1초도 떼지 않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무슨 이유일까. 바람피는 남편을 미행하기에는 여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무리봐도 여자는 결혼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뭘까. 그건나중이고 당장 터질 것 같은 방광이 문제인 기사다. 아랫도리를 잔뜩 움켜쥐고 이를 악무는 기사한테 기계음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나와요.”

 

여자의 목소리에 기사는 앞을 보았다. 오피스텔에서여자와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남자의 팔짱을 낀 여자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연신 남자에게 뭔가를 얘기하고있었다. 누가 봐도 여자는 행복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두사람은 택시를 잡아 탔다. 아마 어제 낙원이란 술집 근처에 주차해놓은 차를 찾으러갈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기사는 소변을 참느라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여자와남자가 탄 택시를 쫓아가자고 하면 큰일 날 일이다. 이제 그냥 바지에 싸야할 판국이다. 그런 기사에게 여자는 구세주같이 말했다.

 

“나머지 50만원이어요.”

 

여자는 봉투 하나를 내밀고 택시에서 내렸다. 여자를덩그러니 내려놓은 택시는 화장실을 찾아 득달같이 내달렸다. 여자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지루해질만큼 서있던 여자는 문득 하늘을 보았다. 황사에 뒤덮힌 하늘에는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손은 왜그래?”

 

반장이 잔뜩 고개를 쳐들어 호철을 보며 말했다.


“그냥...”

 

호철이 자판기 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은평경찰서에서 연락받았어. 무슨 교주가살해 당했다고?”

 

“천년영화교 교주입니다.”

 

“저쪽에서는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은근히 말하던데.”

 

“합수부를요?”

 

호철의 목소리가 경직됐다.

 

“무슨 근거로 합수부입니까?”

 

“그 교주 살해방법이 오상복이하고 윤진우 사건하고 같다면서.”

 

그 김형사인지 뭔지 하는 놈이 입을 놀렸다. 당분간비밀로 해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생긴 것부터 맘에 들지 않은 놈이었다.


 
“연쇄살인은 아직 공식적인 게 아닙니다.”

 

“알아. 그래서 은평 쪽에서도 강력하게주장하는 건 아냐. 그렇다고 언제까지 단독수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피살자 혀가 절단됐다는 거 알지? 엽기적이잖아. 지금은 은평 쪽에서 그 사실을 대외비로 하고 있지만 그거 언론에 흘러나가는 건 시간문제야. 그 순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날 거야. 그럼 우리 힘으로는수습이 안돼. 당장 시경에서 치고 들어와서 합수부를 차릴 게 뻔하다구.알아?”

 

“압니다.”

 

호철이 잔뜩 볼멘 목소리로 대답한다.

 

“알면 대책 있어?”

 

“시간을 주십시요.”

 

“시간? 무슨 시간. 당나귀 싸이트 IP주소 나올 때까지? 그게 언제야? 알래스카에서 냉장고 팔아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야?”

 

“삼일만 주십시요.”

 

“삼일? 그동안 뭐하려고?”

 

“꼭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꼭 해야할 일?”

 

반장은 앵무새처럼 호철의 말을 반복하고 호철을 바라보았다. 바위 같은 눈빛이다. 호철이 이럴 땐 대책이 없다는 걸 반장은 안다.

 

“좋아. 삼일 주지. 삼일 후에는 무조건 합수부야.”

 

“알겠습니다.”

 

“합수부가 차려지면 어떤 포지션을 차지할지나 잘 생각해둬. 잘못하면 죽쒀서 개주는 꼴 되니까.”

 

반장은 다 마신 종이컵을 손으로 우직 구기면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강무세.

 

소녀는 호철에게 현현기경에 나오는 문제를 이용해서 다음 피살자를 예고했다. 아니 그것은 예고라기보다도 강무세라는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스스로 범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소녀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알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성을 차리자 호철의 머릿속에는 온통라는 의문어가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왜 소녀는 그런 흉악한 살인마가 되었는가?

 

소녀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은 죽어도 싼 인간들이었다.그런 인간들을 마치 집행자처럼 살해했다. 기껏 열여덟 살 소녀에게서 그런 사회적 정의감과살인을 할 만큼의 결단성이 있다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건 단지 겉으로 드러난 가식일뿐이다. 소녀에게서 뭔가 숨겨진 사실이 있다고 믿는 호철이다. 그리고...

 

왜 소녀는 나에게 범인이라는 것을 고백했을까?

 

이것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머릿속에 온통 가득 차 있는라는 것을 풀어야한다. 그래야 소녀를 체포할 수 있다. 지금 체포해봐야 껍데기일 뿐이다.

 

어쩌면...

어쩌면 소녀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생각이 호철의 가슴속 밑바닥에서희미하게 움트고 있었다.

 

어쨌든 호철에게 주어진 시간은 삼일이다. 삼일안에 어디까지 풀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호철은 일단 소녀의 신상정보를 알아낸다. 소녀의말처럼 소녀의 부모는 같은날 사망했다. 두 사람이 같은날 사망했다는건 사고라는 증거다. 사망일은 5년전, 2008 729. 그날 무슨일이 있었는지 호철은 지나간 신문을 검색했다. 부모의 사건은 신문에 실려 있었다.

 

           분당의 단독저택에서강도살인사건 발생

         어젯밤 분당의 한 단독저택에 강도가 침입해
         집주인인 유모씨와 격투 끝에 유씨 부부와강도가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집안에 침입한 강도와 격투 끝에 집주인 부부와 강도가 사망했다면 사회적으로 꽤 큰사건이다. 그런데 기사는 의외로 짧게 다뤄졌다. 하다못해다른 가족 상황이라든가 신고자 정도는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 일체 생략된 기사였다. 다른 신문도마찬가지였다. 사건 이후 후기를 다룬 신문도 없었다. 누군가가사건의 기사화를 철저하게 막은 냄새가 났다.

 

호철은 즉시 분당경찰서의 당시 사건담당 경찰을 만났다. 계장급인 40대 중반의 남자는 당시 사건을 묻는 호철에게 사냥개같은 반응을 보였다. 혹시 뭔가 있지 않는가 후각을 내세웠다. 뭔가있으면 나눠 먹자는 속셈이다.

 

“벌써 5년전 사건이야. 그걸 지금에 와서 어쩌려고?”

 

“이번 진급시험에 참고자료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요. 선배님.”

 

“진급시험이야?”

 

“네.”

 

“계급이 경장이랬지? 그럼 경사 진급인데몇 살이야?”

 

“서른다섯입니다.”

 

호철의 대답에 남자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나이에 간부급인 경위도 아니고 기껏 경사시험에 목을 매고 있는 호철이 안타깝게 보였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호철과 남자는 경찰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우거진나무에서 매미가 귀가 따갑도록 울어댔다. 남자는 벤치에 앉자마자 담배불에 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사건 당시 기사 봤어?”

 

“봤습니다만 뭔가 덮어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 잘 봤어. 사실 그랬어. 당시 피해자 가족 중에 끗발 있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야. 재빠르게 언론 쪽에 손을 써서 보도를 최소화했어. 물론 경찰 쪽에도손을 썼을 거야. 윗선에서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는 특명이 내려왔으니까.사실 종결이고 뭐고도 없었지. 피해자나 강도나 모두 현장에서 사망해 버렸으니까 말이야.”

 

“목격자는 없었습니까?”

 

“그 집 딸이 현장에 있었어. 어디까지목격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증언이 불가능한 상태였어. 사건의 충격으로말을 잃어버렸어. 실어증 말이야. 거기다 정신도 나가버린상태고. 하긴 그 어린 나이에 그런 험악한 꼴을 보고도 정신이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한 거지. 그때 당시에 중학생이라고 들었으니까.”

 

남자의 말에 호철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담배를 비벼 끈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암튼 유일한 목격자가 그 모양이니 모든 건 현장 상황으로 사건을 추론할 수밖에 없었어.”

 

남자는 당시의 생각을 끄집어내려는 듯 잠시 생각을 하다 말을 이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어. 엄청난폭풍우였지. 아마 집주인 부부도 빗소리 때문에 강도가 침입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몰라. 암튼 강도는 부부가 잠자고 있는 침실로 들어왔어. 부부가 강도의기척에 눈을 깼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겠지. 강도는 칼로 위협하며 남자를 끈으로 묶었어. 여자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겠지. 거기서 금품만 털어갔으면 그런비극은 없었을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자가 굉장한 미인이었거든. 그게 강도를흥분시킨 거야.”

 

“그럼...”

 

“강도가 여자를 성폭행한 거지. 남편이보는 앞에서 말이야. 부검에서 여자의 질속에서 소량의 정액이 검출됐어.물론 강도의 정액이지. 정액의 양으로 봐서 완전 사정까지는 가지 않았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여자를 성폭행하는 도중에 뭔가 방해되는 사태가벌어진 거야. 어떤 사태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거지. 자신의눈앞에서 성폭행 당하는 아내를 보고 남편의 눈이 뒤집힌 거야. 남편이 끈에 묶인 채로 강도한테 덤벼들었겠지. 한마디로 처절한 몸부림이지. 생각해봐. 손이 묶인 채로 칼을 든 강도한테 대드는 남편 말이야. 이미 자신의목숨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런 남편이 필사적으로 강도를 온몸으로 막았겠지. 여자는 그 순간을 틈 타 밖으로 도망가고. 그때 강도가 남편한테첫 자상을 입혔어. 옆구리 부분이야. 그리고 여자를 쫒아갔지. 거실로 도망나온 여자가 다급하게 경찰에 신고를 했어. 그걸 본 강도도다급했지. 전화를 하는 여자를 무차별로 찔렀어. 내 기억이틀리지 않는다면 여섯 군데였을 거야. 여자는 소파에 상체를 걸친 채 사망했어. 그리고 남편이 칼을 들고 강도한테 달려들었어. 주방에서 칼로 묶인끈을 자르고 온 거지. 그렇게 두 사람이 칼부림을 하다 사망한 거야.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침실에서부터 거실까지 온통 피바다였어. 세 사람의 피가 흘렀으니어땠겠어? 끔찍했지. 더 끔찍한 건..."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자욱하게 연기를 허공에 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 피바다 속에 그 집 딸이 정신을 놓은 채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었어. 그때 그 딸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해. 초점이 없었어. 마치 동공이 풀린 죽은 사람 눈빛 같았어.”

 

남자의 마지막 말은 요란한 매미소리에 묻혀졌다.

 

호철의 가슴에는 마치 무거운 납이 매달린 것 같았다.그 무게를 이기려고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잘게 부서진 햇살이 편린처럼 쏟아지고있었다.

 

 

 

분당에는 소녀의 이모가 살고있었다. 소녀가물려받은 유산을 관리하는 후견인 같은 사람이다. 호철은 이모를 찾았다.이모는 분당의 요지에서 유명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모라는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소녀의 미모는 모계 쪽 DNA를물려받은 모양이다.

 

“경찰이시라고요?”


호철이 경찰이라는말에 이모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어요.”

 

이모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물로 겨우 입술만 적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무슨 일로.”

 

이모의 목소리는 미모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품위와교양이 넘치는 목소리다. 이모의 질문에 호철은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하고 수첩을 뒤적였다. 소녀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은 호철이다.

 

“유리애 씨. 사장님 조카 말입니다.”

 

호철이 겨우 입을 열자 이모는 그 큰 눈을 다시 크게 떴다.

 

“리애가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아닙니다.”

 

이모의 놀람만큼 당황해하는 호철이다. 시원한에어콘 바람에도 호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살고있어서 말입니다. 다른게 아니고 사소한 문제로 조사 중인데...정말 사소한 작은 문제입니다.그런데 유리애 양이 너무 나이도 어리고그래서 달리 알아볼 길이 없어서...”

 

당황한 호철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무슨 문제인가요?”

 

“그건 아직 조사 중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모는 호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앞에앉아있는 경찰이라는 이 남자의 속셈이 도대체 뭔지 궁금한 이모다.

 

“그래요. 알고 싶으신 게 뭐죠?”

 

“그게...”

 

호철은 목이 타는지 다 식어빠진 커피를 한입에 마시고 말을 이었다.

 

5년전 사건 말입니다.”

 

5년전...”

 

이모는 다시 한번 놀란다. 이모가 놀랄때마다 작아지는 호철이다.

 

“그 사건 이후로 유리애 양의 행적을 알고 싶습니다만.”

 

“도대체 당신 뭐죠? 무엇 때문에 리애의뒤를 캐는 건가요?”

 

이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커피숍에 울려퍼졌다. 이모의목소리에 손님들과 종업원의 시선이 쏠렸다. 종업원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사장님이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

 

“사장님, 진정하십시요. 저는 단지 사건 수사중일 뿐입니다.”

 

“사건 수사요?”

 

이모의 말에 아차 싶은 호철이다. 자신도모르게사건이란 단어가 튀어나와 버렸다. 날카로운 이모의 말이 호철을 추궁한다.

 

“좀 전에는 사소한 문제라고 하지 않았나요?”

 

“죄송합니다. 사실을 전부 말씀드리지 못하는심정 이해해 주십시요.”

 

“이해하라고요? 어떻게 이걸 이해하라는거죠? 좋아요. 말을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알아 볼 수밖에요.”

 

이모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떨어지는지 이모는 핸드폰에 대고 말을 쏟아냈다.

 

“리애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경찰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널 묻는데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사건이라는데 도대체 그게 뭐야.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이모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핸드폰 너머로소녀가 뭔가를 말하는 모양이다.

 

“알았어. 밥 꼭 챙겨 먹고. 이모가 다시 전화할게.”

 

이모는 핸드폰을 끄고 턱에 손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철은 소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이모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다. 이모의 프로필은 마치 조각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소녀가 저 나이가되면 아마 저런 여자가 될 거라고 호철은 생각했다.

 

“불쌍한 아이여요.”

 

시선을 그대로 창밖에 둔 이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5년전에 부모를 잃었죠. 그것도 처참하게 강도한테 칼에 찔려서 말이죠. 경찰이라면 더 자세한것도 알겠군요. 리애 엄마는...”

 

초승달처럼 긴 눈썹을 가진 이모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더 처참했어요. 강도한테 그런 짓을...그것도 남편 앞에서...”

 

목이 매이는지 말을 끊은 이모는 잠시 창밖을 보다 호철을 보고 말을 이었다.

 

“강호철 씨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리애가 그러더군요. 강호철 씨라면 무슨말을 해줘도 괜찮다고.”

 

이모의 말에 호철은 고개를 떨궜다. 마치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모의 말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지 묻지 않겠어요. 리애가 그렇게말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죠. 원래 그런 아이여요. 나이는어려도 속이 깊은 아이여요.”

 

이모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사건은 크게 보도가 안됐어요. 남편이언론 쪽에 손을 썼어요. 리애 때문이었죠. 당시 리애는 중학교 1학년이었어요. 어린 아이가 충격이 얼마나 컷겠어요. 언론에서 떠들어대면 상처만 커질 거란 생각이었죠.”

 

“실어증에 걸렸다고 들었습니다만.”

 

“말을 잃어버렸죠. 그리고 정신까지도요.”

 

“무슨 말씀이신지.”

 

“하루종일 먼산만 바라봤어요. 초점 없는눈으로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점점 심각해졌어요. 정신병원을찾아갔더니 입원을 하라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정신병도 병인데 의사 말을 따라야지요. 결국병원에 입원시켰어요.”

 

“얼마동안 입원했습니까?”

 

3년 만에 퇴원했어요. 하지만 완치가 된 건 아니여요. 리애를 만나봤다면 아시겠지만 말투가정상인하고 달라요. 실어증 후유증이라고 하더군요. 의사 말로는자주 대화를 하면 정상인처럼 된다고 하는데 그게 또 문제죠. 리애한테 대인기피증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사람들하고 말할 기회가 없는 거여요. 어쨌든 그래서 학교도다니지 못했어요.”

 

“퇴원 후에 바로 혼자 살았습니까?”

 

“아니어요. 제가 데리고 있었어요. 1년 정도 살더니 혼자 살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펄쩍 뛰었죠. 그런데도 막무가네였어요. 결국 제가 졌죠. 상계동에 리애 아빠가 사놓은 아파트가 있었어요. 작년 9월에 거기로 이사를 한 거죠.”

 

호철은 시선을 수첩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수첩에는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그 순간 이모의 말이 귀에 들렸다.

 

“혹시...”

이모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사건이라고 하셨는데 전 리애가 경찰의 조사를 받을만한 일을 했다고는 추호도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건 아닌지...”

 

“다른 생각이면.”

 

“가령 리애를 여자로 생각한다든가 하는...”

 

이모의 말에 호철은 어이가 없었다. 당황한호철은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아닙니다. ...전혀 그런 거 아닙니다. 공적인업무일 뿐입니다.”

 

“미안해요. 제가 쓸데없는 오해를 했군요.”

 

호철의 당황에 이모는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뜻밖이었다.

 

“사실 리애한테는 감정이 없어요.”

 

“감정이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호철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여요. 5년전 그 사건 이후로리애는 말과 함께 감정도 잃어버렸어요. 희노애락(喜怒哀樂)이란 게 없지요.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그 아이는 느낄 수 없어요. 리애는..."

 

이모는 슬픔을 억누르는듯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평생 그 어느 누구도 사랑 할수 없는 아이여요.”

이모의 말이 마치 쇠못처럼 호철의 가슴에 박혔다.

 

소녀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호철이다. 호철은 가슴에 또 다시 무거운 납을 매달은 느낌이었다. 잠시 시선을빈 커피잔에 둔 호철이 보기에도 아까운 미인을 마지막으로 동공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리애 양이 입원한 정신병원이 어딥니까?”

 


 

 

커피숍을 나온 호철은 기진맥진이었다. 갑자기쏟아진 너무나 많은 정보가 호철의 심신을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었다. 리애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을탐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병원탐문을 내일로 미루고 코란도를 고속도로 위로 올린다.

 
-리애는 평생 그 어느 누구도 사랑 할수 없는 아이여요.-

 

리애 이모의 말이 호철의 귀에 쟁쟁거렸다. 그런소녀를 체포해야 한다. 연쇄살인범으로. 자신의 직업이 경찰이라는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조그만 희망이 생겼다. 소녀가연쇄살인범이라도 정신병이라면 선고유예를 받을 수도 있다.

 

호철이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 핸드폰이 울어댄다. 지현이다.

 

전화 속의 지현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주체할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지현은 호철이 말할 틈도 안주고 연신 재잘거렸다. 수다스럽고 웃음 많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다. 하루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고 그것이싫은 것만도 아니다. 그런 지현이 귀엽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호철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문득 지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철에게 지현은 첫 여자가아니다. 대학교때부터 지금까지 많지는 않지만 몇명의 여자를 만났다. 하지만어떤 여자도 호철의 가슴속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여자와의 섹스는 호철에게 허무를 안겨주었다. 자고나면 여자는 호철의 가슴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보고 싶고 말하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
이게 사랑인가.-

 

호철의 질문에 애마인 코란도가 대답한다. 

코란도는 쭉 뻗은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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