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윤사달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신도교와 구원3파 교도들이 남악 뜰에 모여 독이 든 점심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선했다. 이윽고 3시를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음악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찢어져라 내려치는 북소리에 맞춰 하나님을 부르며 할렐루야를 연호하던 소란은 10여 분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변함이 없었다. 하늘에선 그저 소담스러운 눈송이가 하늘거릴 뿐 횟빛 하늘은 한 치도 열릴 기미가 없었다. 신도 하나가 단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수련장의 괴변을 허겁지겁 알렸다.

“큰일났습니다. 지부장님과 장로님들이 모두 자살했습니다. 구로다 회장님도 자살하신 게 분명합니다.”

좌중은 일순 찬물을 끼얹듯 조용했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어나자 미우라가 마이크 앞에 섰다.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그분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잘못 계산된 휴거일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드시 들림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만이 휴거가 아닙니다. 육신을 썩히어 영혼만으로 주님을 찾아가는 것도 휴거일 것이오. 그런 점에서 구로다 회장님을 비롯하여 지부장과 장로님들은 결단을 하신 게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치 벌떼가 나는 듯 웅성거리는 통성 기도가 이어지는 중에 미우라의 괴이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여러분, 모두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립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새벽이 올 때까지 기도합시다!”

모두들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할렐루야를 연호하는 함성이 이어졌다. 이들은 휴거가 불발로 끝이 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기도를 계속했다. 김순원은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 몽총한 표정이 돼 버렸다. 갑자기 미우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곁에 앉았던 마순호의 가슴이 붉게 젖어 있는 것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총격에 의해 사망한 지 상당한 시각이 지난 것으로 보였다.

누군가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미우라는 불빛 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치 유령은 본 듯 뒷걸음치며 손을 뻗었다.

“당신은 오죽 아닌가?”

“너희가 살아 있는데 죽을 수 있어야지.”

미우라는 가볍게 탄식을 뿌렸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마순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가슴을 부여잡은 그의 처참한 모습은 마씨3인방이라는 실세의 그림자는 없었다. 윤사달의 말이 무심했다.

“자네들 삼합회가 북악(北岳)의 정기를 끊기 위해 몸부림칠 때 내 힘으론 막을 수 없었네. 그러나 남악(南岳)만은 결코 자네들 뜻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북악의 정기를 끊었다는 것은 바로 일본대사관을 말한다. 미우라의 제청에 의해 종로구 중학동에 자리 잡은 일본 대사관은, 풍수적으로 서울의 주산인 북악의 정기를 빼앗고 서울의 외명당(外明堂)으로 공급되는 모든 정기를 차단시켰다. 이것은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내명당수(內明堂水)와 주산인 북악의 왼쪽 기슭의 물이 합해지는 합수(合水)의 땅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수상의 합수처는 어디인가? 바로 경복궁 옆 동십자각이다.

“그대들이 대사관을 지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아.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하고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을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지은 것은 섬나라 원숭이들의 잔꾀에 불과함을 어찌 모를까.”

아직도 미우라는 여유가 있었다.

“반세기를 이어온 우리의 계획이 오늘에 이르러 좌절됐지만, 무엇 하나 우리 일본인들의 허물로 내세울 것은 없네. 한국인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혐오한다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말이지 사실은 달라. 어느새 우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우리 문화 속에 젖어 버렸지 않은가. 그대들이 언제부터 포르노를 보았으며, 그대들이 언제부터 빠징코를 들락거렸는가? 또한 그대들은 언제부터 가라오케를 즐겼는지 말해 보게. 그것은 모두 우리 문활세. 자네가 주장하는 것은 한결같이 우리 일본의 문화란 말일세. 몸은 한국인이지만 정신은 일본인이지.”

미우라는 괴소를 흘리고 나서 덧붙였다.

“이보시게 오죽, 오늘은 내 처지가 초라하네만 우린 다시 한국에 오네. 우리의 혼이 살아 있고, 한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상 한국은 우리의 이웃이라기보다 향기로운 먹잇감이지. 안 그런가?”

그는 품안에서 몇 알의 단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윤사달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전연 만류하거나 저지시키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미우라가 호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반세기를 이어온 계획이 오늘에야 무너졌네만 우린 결코 포기하지 않네. 아시겠는가?”

“그러한 호언장담이 ‘케이 투 프로젝트’라면 꿈을 깨게.”

“뭐야?”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네.”

그때였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남악 수양관에 불길이 치솟았다. 피어오르는 화광은 너무 장엄했다.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이 마치 불화로 속으로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보고 미우라는 미친 듯 웃어댔다.

“이보시게 오죽, 저 불길을 보게! 우리 삼합회의 허물이 타고 있네. 감춰야 될 부분도 타고 남았어야 될 부분도 타네. 아하하하하!”

“저걸 자네들이 태운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저 불길은 박사주가 손을 쓴 거네.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네. 남악의 지하 벙커에 기름을 채워 두었으니 지하수에 기름이 섞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 안 그런가?”

“….”

“자네들은 수양관에 있는 해괴한 것들을 공개하여 한국에 소란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있었겠지. 처음엔 박사주도 그런 점을 염두에 뒀었어. 남악에 세운 수양관인데 굳이 불태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고. 그러나 쥐 때문에 불을 질렀을 게야. 박사주는 쥐를 몹시 싫어하거든.”

“쥐라니?”

“자네들이 풀어놓은 독을 해독시키기 위해 물탱크에 쥐를 몰아넣었거든. 물론 쥐들은 해독약을 먹었을 테지. 짐승을 다스리는 재주는 박사주가 뛰어나거든.”

“….”

“그 쥐들이 물탱크에 바글거리니 박사주 기분이 좋을 리 없지. 그래서 불을 놓았을 것이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을 자네들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을 게야.”

미우라의 뒤에 서 있던 사대 호법 중의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단번에 윤사달을 요절낼 듯 발을 쾅쾅 거렸으나 이내 바닥에 거꾸러졌다. 그의 가슴에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고 윤사달은 몹시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허, 이거참 미안하게 됐네. 저쪽에 있는 전망대 말일세. 거기에 저격수가 있네.”

“저격수라니?”

“자네들이 보낸 히라다 말일세. 그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거 어쩌나, 히라다 그 친구 한국인으로 귀화할 모양이야. 그동안 지은 죄를 속죄라도 할 겸 이번 일을 자청했네. 어떠신가, 아직도 저 불길에 미련이 있으신가?”

미우라는 망연히 남악 수양관을 바라보았다. 반세기, 말이 반세기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계획하고 행동으로 움직였는가? 물 한방울 샐 틈 없이 완벽하게 쌓아 올린 탑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2부 끝 -

* [방랑기객]의 사이버오로 연재는 2부 209화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꾸준히 성원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기회에 3부 이하를 다시 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원고료도 받지 않고 바둑문화 발전을 위해 장기간 작품을 주신 여설하 작가님께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