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쥔 구슬

뱀 한 마리가 가슴속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더니 구슬픈 울음소리로 잠이 든 박사주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으나 곁에는 잠든 세 사람의 피곤에 지친 모습뿐이다. 박사주는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어쩐 일이십니까, 부장님.”

탁원제가 부스스 일어나며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역시 꿈자리가 사나워 비몽사몽간에 꿈길을 헤맸다. 심각한 박사주의 낯빛을 보는 순간 더욱 불안해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서도 가슴 한곳에 접어 두었던 불안한 그림자에 쫓기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던 김순옥과의 비밀이었다.

얘기는 5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암 허련 선생의 행방을 찾아 신도원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역경원에서 허련 선생의 흉내를 냈던 노인은 영매자(靈媒者) 문도식(文道植)이었다. 무당이나 판수였는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그는 글줄이나 읽은 유생으로 집안이 부유한 덕에 열아홉 살짜리 순화(順花)라는 첩실을 거두었던 한량이었다. 순화는 품성이 고운 탓에 문노인의 부인에게 사랑을 흠뻑 받았다. 서로 간에 투기하는 법도 없었고, 지성으로 남편을 공양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얘야, 내가 죽으면 이 집안에 남아 살림을 이어받거라. 그래야만 내 아이들이 안심하고 자랄 게 아니냐.”

문도식 노인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네명이 본부인 소생이고, 막내만이 순화의 핏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돌림병이 돌아 모든 식구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홀로 남은 문노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죽었던 순화가 문노인의 베갯머리에 나타났다.

“영감님, 이곳은 살 만한 곳이 못되니 서울로 가세요. 서대문 밖에 가시면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문노인은 그 꿈을 믿고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서대문 밖에서 만 3년 동안 역(易)을 보았는데, 이것은 죽은 어린아이의 영(靈)이 붙어 그렇게 됐다는 풍문이었다. 다섯 아이 가운데 어느 아이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영이 붙어 신통한 영매점을 치게 된 것이다.

문노인이 어떤 연유로 신도원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탁원제 일행을 지하 토굴로 들어가게 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모양이다. 문노인은 스스로 그들에게 대항하여 탁원제가 갇힌 토굴로 들어왔다. 당시 노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 몸주께서 말하기를, 자네는 한때 처지가 외로우나 머지않아 이름을 크게 날릴 것이라 했네. 그러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게. 여기서 나가면 자넨 명도(明圖)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네. 아시겠는가? 내가 죽으면 밖에 알리질 말고 주검을 저쪽에 놓아두게. 그리하면 자네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있을 것이야.”

노인은 그날 밤 목숨을 끊었다. 뒷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토굴 안의 뾰족한 돌부리에 머리를 짓이겨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너무나 황당하고 두려운 생각에 탁원제의 정신은 송곳 끝처럼 날카로워졌다.

토굴 안에 고인 물로써 갈증은 해갈시켰지만 육신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보름이 지나자 눈은 퀭하니 들어가고 의식까지 희미해졌다. 그러한 그들에게 생명 양식을 제공한 것은 문노인이었다. 그들은 문노인의 몸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잡아먹고 죽음의 아래층에서 버티어 온 것이다.

신도원을 철수할 때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우라는 다시 남악수양관으로 데려온 것이 박사주와 조우하게 된 사연이었다. 탁원제는 단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그것은 아직도 죽음의 퍼즐을 벗어나지 못한 스스로의 처지와 문노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한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난 박사주는 또다시 삼각기를 일정한 법식에 맞추어 꽂아 갔다.

“서둘러야겠어. 꿈길이 좋질 않네. 지금 시각은 오전 9시는 넘었겠지?”

박사주는 다시 덧붙였다.

“누군가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네. 뱀 한 마리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휘저은 것으로 보아 사시(巳時; 오전10시경) 이전에 가야만 그나마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두 손을 합한 채 다시 주문을 외어 댔다. 대략 3분쯤이 지나 어디선가 우르르 쥐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훈련이 잘된 듯 삼각기가 꽂힌 안쪽으로 일정하게 달려왔다.

기미꼬는 뜻밖의 변화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일본에 있을 때 ｢진기명기｣ 시간을 통해 이와 비슷한 묘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뱀을 부리는 기술이었다. 후지산에서 온 어느 도사가 방송국에 나타나 뱀을 부리는 기술 하나로 방송국 직원들의 지갑을 훔친 일이 있었다. 휘파람 소리를 들은 뱀들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각기 지갑 하나씩을 물고 나타났었다. 기미꼬는 그때와 마찬가지의 묘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사주는 앞쪽에 놓인 일곱 개의 삼각기를 한 줄로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소리가 진폭 되자 쥐들은 황급히 삼각기가 꽂힌 아래 부분을 파들어갔다.

“기문둔갑에는 이보다 더 기묘한 법술이 있네. 이것은 지극히 작은 기술이야.”

쥐떼들은 순식간에 쇠창살 아래쪽을 파들어가더니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공간이 생기자 쥐떼들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래쪽에서 기름 냄새가 납니다. 남악 수양관의 지하에 벙커가 있으며 상당량의 기름이 매장되어 있는 게 확실해요. 모르긴 해도 그곳 어디에 뜻밖의 물건이 숨겨져 있을 것이오. 지금 그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어떻게든 모여든 사람들을 수양관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밖에 나가면 오죽 선생님이 와 있을 것이오. 그분에게 지하실 상황을 말씀 드리세요. 나는 2층에 있는 예배당으로 가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