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이것 봐 김기자. 어서 진역관으로 가보게.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모양이야.”

새벽 단잠을 침대 머리맡에 떨궈놓고 김순원은 부리나케 신당동으로 향했다. 층계 입구에 군용 지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마상섭 대령이 온 게 분명했다. 김순원이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들이 그를 맞이했다. 무뚝뚝한 마상섭 대령을 비롯하여 언제나 무표정한 낯으로 허공에 시선을 뿌리는 오죽 윤사달, 벽암과 송학수, 그리고 히라다와 기미꼬가 자리를 함께 했다.

보료가 깔린 안쪽으로 자리를 잡은 윤사달은 먹물을 묻혀 찍은 부도(符圖)를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12453 · 13221 · 15001이라는 일련번호가 찍힌 소화(昭和)년도의 금덩이었다.

김순원 쪽으로 시선을 뿌리며 마상섭은 다시 한 번 금덩이의 일련번호를 탁본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어젯저녁 늦게 세 개의 금덩이가 마순호 대령 집으로 배달되었소. 급한 나머지 우리 직원들이 탁본시킨다는 게 그렇듯 이상한 모양이 됐습니다만, 갑자기 그런 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김시우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출입했던 곳은 남악수양관에서 고작 명동뿐이었다. 물론 주식회사 무극의 기획실에 들른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물건을 몸에 지닐 만큼 여유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었다. 김순원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사회부 기자들이 추적한 게 바로 금괴의 행방이었습니다. 두 달 전 누군가가 제보를 해왔었죠. 그것은 한 장의 지도였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 장씩 지니고 있다는 남악과 보물지도에 관한 지도였어요.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 지도엔 몇 줄의 싯구가 끼적거려 있었죠. 내용을 알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만, 우리가 해석한 바로는 금구에 있는 개동사 지하 창고에 금괴가 있다는 결론이었어요.

우리 직원들이 도착했을 땐 지하 창고는 텅 비었는데, 그 안쪽에 두 구의 시체가 있었거든요. 한사람은 동대문에 있는 모 심부름센타의 사장인 정순기(鄭純起) 씨로 밝혀졌고, 다른 사람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동대문 서에서 지문 감식을 했는데 당사자를 알 수 없다고 통보 받았어요. 그런 것으로 본다면 신원불상의 사내는 아마 일본인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미꼬가 멈칫거리며 물었다.

“제보자는 누구였나요?”

“박사주였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알았거든요. 당시 우리와 동행한 동대문 경찰서 수사과에서도 백방으로 금괴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지금껏 흔적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화 연도의 일련번호가 찍힌 금덩이가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거 웃어야 할지 어쩔지 어안이 벙벙합니다.”

그런데 꼭꼭 숨겨져 있던 금덩이의 일부가 마순호의 집으로 보내진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약한 문제 때문에 마상섭은 진역관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정보부 김부장 구명 운동에 나선 죄로 일정한 보직을 받질 못했어요. 어르신이 하는 일에 무조건 찬성할 수만 없어 그저 한직에 눌러 앉아 세월만 죽이고 있었구요. 저번에 마충길 대령의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본래의 자리로 복귀 했습니다만, 이제까지 마순호 대령이 진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만.”

윤사달은 사건을 예리하게 분석해냈다.

“마충길 대령이 2백대 기업을 주무르며 비자금을 조성했던 것은 상당한 액수일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그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없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상섭은 선선히 수긍했다. 자신이 일선에 나선 지금도 비자금에 관해서만큼은 전연 아는 바 없다고 털어놓았다. 윤사달의 분석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서로를 보완해 주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구로다 회장의 비행이 보도되고, 그 장소가 신도원으로 밝혀지면서 마충길은 자신이 물러날 시기를 노렸던 거죠. 그는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자인하고 책임지고 요직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사실 언론에서 떠드는 것으로 봐선 당장 잡아들여 중형에 처해야 옳지만, 이미 미국으로 출국한 뒤였어요. 물론 야당 쪽에서는 고의적인 도피라고 떠들지만 그건 배 떠난 다음 고동을 울리는 격이 아닙니까.”

설령 마충길을 잡아들였어도 그에게 벌을 내릴 사람이 누구겠느냐고 되물었다. 김순원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렇다면 제가 기사를 잘못 쓴 게 아닙니까? 틀림없이 박사주께서는 닭을 잡고 오리를 친다는 계책이었는데, 결과가 이렇다면 저들의 계획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돼버렸는데요.”

윤사달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오. 김기자가 그런 기사를 다루었기 때문에 동남아를 무대로 활약하는 ‘호시 구미(星組)’로부터 상당액을 지원받은 근거를 찾아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지요. 그 외에도 차명계좌를 통해 상당한 액수가 마충길의 계좌로 흘러들어간 걸 포착했어요. 그들이 언론 플레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봤다 해도 더 큰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만, 이 일을 계획한 누군가가 그런 점을 계산에 넣었다면 상대를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그 이유로 이번에 노출된 금덩이를 꼽았다.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고 마순호 대령의 집으로 보냈다는 것은 확실한 묵계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짚어나갔다. 그들은 색다른 거래를 하고 있다는 모범답안을 찾아낸 것이다.

색다른 거래. 그것이 무엇인지에 마상섭은 골몰했다. 그동안 분석관 정보에 의하면 제4공화국의 일부 정치인들이 이들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긴 했었다. 그러나 그 액수는 지극히 미미했다.

삼합회의 간부들이 입안의 혀처럼 간구하고 소중히 여겼던 것은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파고들어 그들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중에 10. 26이라는 소나기를 맞았고 12. 12라는 돌풍에 휘말렸다. 당연히 사업 구도가 크게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삼합회는 마씨3인방의 실세들과 거래관계를 유지한 것은 현명한 판단일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시점에서 세 개의 금덩이를 왜 마순호의 집으로 보냈는가였다. 그것이 색다른 거래의 대가라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를 하는 중 정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방배동 카페 골목에 있는 ‘쵸이스’ 모텔이 마순호의 부인 송인아(宋仁雅) 앞으로 등기수속을 밟는 중이라는 보고였다. 정보를 접하고 나서야 윤사달은 단언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헌납이나 등기 이전 수속을 밟아 이쪽으로 넘겨주고 있구만. 그렇다면 삼합회 소유의 동산이나 부동산은 곧 제3자 명의로 바뀌는 게 정해진 수순이겠어. 흐음, 이건 양동 작전이야. 병법에서 말하는 성동격서(城東擊西)의 전술이야. 그렇게 하자면 누군가 길안내를 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기미꼬가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신도교 총령 김시우일 거예요.”

마상섭은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의 표면에 구로다와 미우라가 나서는 바람에 특별히 요주의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틈을 비집고 어떤 일을 계획했다면 서둘러 방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순원은 자료철을 뒤적였다. 그것은 마상섭 대령이 참고삼아 들고 온 것으로 이미 여러 사람이 돌려가면서 보았던 것들이었다. 자료철엔 호치케츠에 찍힌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하나는 명동에 있는 ｢칼디｣라는 카페를 원경(遠景)으로 촬영한 것과, 다른 하나는 지난밤 마순호 대령 집으로 금덩이가 든 고기 상자를 운반하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내려다보던 김순원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외로 저었다. 그는 ｢칼디｣의 2층을 검지 끝으로 짚어갔다.

“마대령님, 카페가 있는 이 자린 임대가 엄청나게 비싼 중앙지잖아요. 이런 곳에 카페를 내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만, 여기 2층 말입니다. 무슨 점을 치는 집 같은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관제영첨(關帝靈籤)｣이란 간판이 붙은 이곳 말입니다.”

얼핏 사진을 내려다보던 마상섭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고 나서 뒷 설명을 붙였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은 것 같군요. ｢칼디｣의 2층은 우리를 찾아온 내방객들을 맞이하는 곳이죠.”

그게 무슨 말이냐고 김순원이 물었다.

“사실 비자금 문제라든가 또는 기부금 같은 것 있잖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 얘기를 나눌 장소로 보면 됩니다. 이를테면 상담자를 끌여 들이기 위해 위장한 곳에 불과해요.”

“하필이면 점집으로요?”

“허허허, 그렇게 됐습니다.”

“명동을 오가는 사람 중에 점을 치겠다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경운 곤란하잖아요.”

마상섭은 별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분위기로 보아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이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얼마전 어른신의 종문에서 모임을 가졌었어요. 신설동에 있는 동묘 아시죠. 오전 11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였는데, 그날 마순호 대령은 청학동에서 온 청송자라는 댕기동자와 한동안 시간을 보냈거든요.”

김순원이 의아스러워했다.

“잠깐만요, 댕기동자라면 요즘 주간지에 자주 광고가 실리는 그 사람인 모양입니다. 도호를 청송자라 했었죠. ‘관제영첨(關帝靈籤)’이란 점법에 능하다 했거든요. 백여개가 넘는 죽간(竹竿)에서 한 개의 제비를 뽑아 길흉을 헤아린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점법은 일제시대 ｢관성교(關聖敎)｣라는 유교단체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가진 뒤 뒷풀이로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어요.”

윤사달이 무릎 위를 가볍게 내려쳤다.

“거기요, 김시우란 자가 계책을 마련한 곳이 바로 그곳이오. 이보시오, 마대령. 그 사람들이 어떤 묵계를 했든 김시우란 자가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마대령이 맡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히라다 상은 나와 명동으로 갑시다. 어차피 한국인으로 귀화해 평생을 속죄하며 산다 했으니 작은 일부터 하나씩 매듭지읍시다.”

히라다는 무표정한 낯으로 머리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