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기다려요, 김상무.”

“무슨 일이신데요?”

“그 동목인인가 뭔가 하는 것 말이오. 그 문젠 어찌 됐습니까?”

“깨끗이 없앴습니다. 신도의 사주를 적은 신패를 보관하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기긴 했습니다만, 만주의 허허벌판이 아닌 한국 땅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누군가 신도교를 붕괴시키기 위해 그런 일을 언론에 흘린 거지요. 근거 없는 일에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소. 어쨌든 뒤탈이나 없도록 마무리나 잘해 주시오. 가만…, 2월 28일의 휴거 소동은 볼만하겠구먼. 난 27일 저녁이나 28일 당일에 내려갈 것 같으니 그리 아시구요.”

김시우는 깊숙이 허리를 꺾고 나서 그곳을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옆문이 열리며 스무 살 가량의 청년이 쥘부채를 든 채 들어왔다. 깨끗하게 다린 흰색 한복을 입은 청년의 표정은 물에서 갓 건져낸 복숭아처럼 살결이 고왔다.

그가 주간잡지 광고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왔다는 댕기동자 청송자(靑松子)였다. 항간에 떠다니는 점법이 아니라 그는 108개가 든 죽간(竹竿)에서 하나를 제비 뽑아 귀신처럼 운수를 파헤쳤다.

댕기 동자 청송자. 마순호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신설동에 있는 동묘(東廟)였다. 모시는 분의 가문에서 행사를 치른 탓에 우연히 그곳에 들른 마순호는 옅은 햇살 아래 좌판을 벌린 청년을 발견하고 호기심 반으로 다가갔다. 일백여가지의 죽간(竹竿)이 들어 있는 통을 흔들어 그 안에서 하나의 제비를 뽑아 운수를 헤아려 주는 점법에 마순호는 매료됐다. 더구나 괘사를 풀어 가는 언변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나이든 노인들은 점괘를 받아 들고 감탄했다.

“과시 신점이로세. 어쩌면 족집게 같은 괘사인가.”

마순호는 1백여 개가 넘는 죽간에서 제비 하나를 뽑아 들었다. 청년은 단숨에 운수를 풀어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은 성취됩니다. 그러나 남쪽은 해로우니 함부로 운신하지 마십시오. 그곳은 약한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가정적으로 부인께선 머지않아 아들을 낳을 경사가 있습니다.”

마순호는 좌판을 걷게 하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청년의 말이 뜻밖이었다.

“오늘의 점괘가 그랬답니다. 세 사람의 운수를 보아주면 반드시 귀인을 만난다는 괘사였거든요.”

마순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허허 웃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그가 치는 점사의 적확성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청송자를 곁에 두고 오가는 인물들의 관상으로 운수를 보게 하여 이해득실을 셈질할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청송자(靑松子)라 부르는 댕기 머리 총각의 부친은 왜정 시대에 지리산 청학동으로 가솔들을 이끌고 은거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무렵의 동묘는 ｢관성교(關聖敎)｣라는 유교 계통의 기도소였다. 그렇게 본다면 청년의 부친은 이 종교의 교도가 아닌가 싶었다.

이곳을 참배하며 기도하는 정식 신도수가 일제시대 6천명이었다면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동묘를 내방하는 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배한 후 점을 쳤다. 이른바 ｢관제영첨(關帝靈籤)｣이었다.

청송자는 ｢관성교｣ 교도였던 부친에게서 점법을 배웠을 것이지만 이것은 작은 재주에 불과했다. 그는 관상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순호는 상당수의 동지들과 거래 관계에 있는 인물을 불러 괘사를 파고들었다.

“조금 전에 나간 분은 마음속에 여러 겹의 지략을 숨기고 있습니다. 결코 가까이 해선 득이 없는 인물입니다. 길들인 독사라고 안심했다가 한순간에 물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듭니다. 사장님께선 이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나쁜가?”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그 자의 흉중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사장님께서 잘 아실 일입니다. 제 생각엔 완급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완급이라?”

“고무줄 수법이죠. 필요에 따라 상대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처럼 좋은 게 없습니다.”

그러나 마순호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고, 지금도 상당한 먹잇감을 제공하려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고 나서 말했다.

“잠깐 보아 되겠는가. 일 때문에 서울에 왔다니까 내일이나 모래쯤 다시 부를 것이니 한 번 자세히 보게. 그때 가서도 아니라 면 그 자를 멀리하겠네.”

문밖에는 ｢칼디｣에서 올라온 여종업원이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명동(明洞)은 글자 그대로 서울에서 가장 밝고 화려한 곳이다. 조선 시대엔 명례방(明禮坊) 또는 명례방골이라 하여 훗날 명동으로 동명이 줄여진 유래가 있었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각 명동을 걸으면서 청송자는 부친이 들려준 말들을 떠올렸다.

“명치정(明治町; 명동)의 밤은 글자 그대로 불야성이야. 하늘에 떠 있는 오색 별들을 그곳으로 옮겨 놓았다니까. ‘조선 제일의 번화가’ ‘사치와 유행의 1번지’ ‘여자들만의 거리’가 명치정이지. 너는 한양 땅을 밟으면 이곳을 휘젓고 다녀야 한다.”

아직도 청송자의 머릿속엔 부친의 지엄한 분부가 남아 있었다. 천하는 한갓 손바닥 안에 감춰진 손금처럼 길한 것과 흉한 것, 그것은 비단 속에 감춰진 무늬 같은 것이라 했다.

“아이구, 미안합니다.”

청송자는 누군가 부딪치는 느낌에 허둥대며 깨어났다. 그의 앞에는 예순은 되어 보이는 노파가 보자기에 싼 물건을 움켜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죄송하기는 무슨, 늙은 내가 주책이지. 가만, 여기 어디에 무슨 호텔이 있다 했는데….”

노파는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한지 왼손을 등 쪽으로 돌린 채 자꾸만 토닥거렸다. 노파의 손엔 명동에 있는 R호텔 520호의 약도가 그려진 쪽지가 들려 있었다.

“내 손녀딸이 집을 나갔다오. 내 아들이 병약하니 얼마나 성질이 못됐는지 몰라요. 아무리 말려도 어미 말을 들어먹어야죠.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질을 부리니 손녀딸이 배겨날 리 있어요. 어젯밤에 나갔는데 다행히 이곳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 뭐유. 그러니 총각, 총각이 심부름을 좀 해주구려. 내 사례비는 드리리다.”

현금 5만원을 꺼내 청송자의 손에 쥐어 주며 노파는 몇 번이나 통사정 했다. 말을 듣고 보니 모른 척 하기도 뭣해서 마지못해 보자기를 건네받았다. 그는 한사코 찔러 주는 5만원을 뿌리치고 R호텔로 향했다. 노파의 입에서 쏟아진 말이 뜻밖이었다.

“어이구, 어쩔그나. 품성은 저만하면 괜찮은 놈인디 덫에 걸려 신세 조졌구만잉.”

비교적 큰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소란 때문에 알아듣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