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속의 무늬

2월 하순이라지만 손만 뻗으면 봄 향기를 건져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한 나날이었다. 아무래도 겨울은 매서운 추위와 몇 삼태기의 눈을 볼 수 있어야 풍년이 든다는 ‘이 달의 운세’는 점사가 자못 비관적이었다.

수류성변(水流城邊)

적소성대(積小成大)

‘물이 못 가로 흐르니, 적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된다’는 뜻이다. 무엇이 적은 것이며 무엇이 큰 것인가? 묵상에 젖어 들었던 김시우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곁으로 와서 두 번인가 불렀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손님.”

스물 대여섯으로 보이는 키가 훤칠한 미모의 처녀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녀는 김시우가 탁자 왼쪽에 올려놓은 푸른색 칩을 슬쩍 집어 들었다. 그것은 ｢칼디｣라는 카페 사장을 면담하기 위한 약정한 코스였다. 면담 장소는 ｢칼디｣의 이층 ‘관제영첨(關帝靈籤)’이라는 점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맞이용 방이 있고, 그 안쪽에 고풍스럽게 꾸며진 밀실이 있었다. 김시우는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시오. 내 김상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마순호였다. 그는 마충길 대령이 미국으로 떠난 직후 대부분 사람들을 만날 때 이곳을 이용했다. 음성적이긴 하지만 명동 한복판에 ｢칼디｣라는 카페를 차려 놓은 건 어찌 보면 위장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이 있음으로써 냄새를 맡고 날아든 먹이 감을 포획하는 데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래 어쩐 일이오?”

마순호는 뻔한 사실을 모른 척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각 지부장과 구원3파의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만, 이참에 마대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조직을 깨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순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구원3파에서 보내온 자금은 일부 마대령님 구좌로 입금됐습니다만, 지나치게 언론이 앞서가고 있으니 일처리가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으로선 저의 입지도 어려운 상황이구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뒷자금은 최선을 다해 모아 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시오?”

“저희 행사에 어르신을 초빙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신도교 48개 지부의 모든 자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구원3파에서 모은 헌금도 바치겠습니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남악수양관 만큼은 고수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마순호가 슬쩍 비틀었다.

“김상무는 신문도 안 보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북악은 지기(地氣)가 쇠해 그 기운이 남악으로 옮겨갔다잖소. 머지않아 전라도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그런 곳에, 김상무 같은 재일 교포들이 진을 친다면 어찌 생각하겠소? 그곳에 머무는 의도를 알 수 없다 할 것 아니오?”

“마대령님께선 남악수양관이 폐쇄되길 원하십니까?”

“그건 어르신의 뜻이네. 생각해 보게. 지금 신도교의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져 세상이 시끄럽네. 아직은 어르신의 마음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네만, 티브이에 방영된 내용대로라면 자네들을 당장 잡아들여 교수형에 처해도 시원치가 않아. 그 동안 김상무께서 마충길 대령을 통해 음성적으로 지원해 왔으니 그 점에 대한 인정을 버리지 못하신 게구.”

“감사합니다.”

“내 재밌는 얘기 하나 하지. 도봉구에 가면 번동(樊洞)이 있고, 종로구 효제동엔 예이동(刈李洞)이 있네. 이런 이름은 지명으론 어울리지 않거든. 한데 말일세, 도봉구의 번동은 예전엔 벌리(伐李)라고 부르던 곳이오, 그곳 어디엔가 벌리사(伐李司)를 두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생긴 것으로 보는데.”

벌리사는 오얏나무를 베는 관청으로 고려 말엽 세워졌다. 한양 땅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므로 머지않아 이씨가 나라를 세운다는 참언(讖言)이 유행할 무렵이었다. 오얏나무가 무성하면 이씨들이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쇠한다 하여 오얏나무만 전문적으로 베는 관청이 생겨나 이씨의 기운을 누른 것이다. 그래서 동리가 ‘벌리’고 잘 쓰지 않던 번동이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게 예이동이다. 이씨가 발호하여 고려를 엎을 것이라는 참언이 나돌자 한양 동쪽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것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지명이 ‘오얏나무를 벤다’는 뜻으로 예이동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이곳 지명은 ‘이씨를 배출한다’는 뜻으로 종이촌(種李村)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본다면 풍수적으로 어떤 기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해서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전라도 출신의 대통령이 출현한다는 것은 하늘이 정해 준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순호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에야 왕위가 세습제였으니 그런 것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달라요. 나이 들어 손자를 볼 시기인데 어느 누가 그를 대통령으로 찍겠어요.”

그런 점에서 어르신의 고충이 있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본다면 김시우의 절충안은 미흡했다.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안되겠지만, 지난번 마충길 대령의 처리 문제는 매끄럽지 못했어요. 그를 미국으로 내쫓은 입금 액수도 그렇고….”

“갑작이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점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만있는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어르신의 불호령이 떨어졌겠죠.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우리측 정보에 의하면 ‘케이 투 프로젝트’라는 것을 만들어 진행 중인 모양인데, 도대체 김상무는 어쩔 셈이오?”

“방도를 마련 중입니다.”

“그렇듯 미온적인 답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 신도교에서 일어난 사건 · 사고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성명서가 답지하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우리 쪽에서 가만있으면 그쪽과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걸 알리는 셈이 되고, 김상무 쪽이 다칠까 봐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해요. 표면적으로는 내사 중이라고만 어물거렸지만 한정 없이 방치할 수 없는 일 아니오. 그러니 어떻게든 수습을 서둘러야 해요. 이것 급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구, 지금 구원3파에서 ‘휴거’라는 것을 내세워 온 나라를 소동시키고 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다루려고 태평천합니까. 2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처릴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점도 보고 드리겠습니다. 조금도 어르신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신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어르신께선 어렵고,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면 내가 잠시 들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어요. 그런 줄 알고 연락합시다.”

김시우가 일어서자 황급히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