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에서 시선을 거둬들이며 미우라는 탁자를 내려쳤다. 이런 상태라면 조직이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었다. 그는 피곤한 몸을 소파 깊숙이 묻히며 어릿감은 두 눈 위에 손바닥을 대고 가만히 눌러보았다.

‘우려했던 일들이 신문 방송에 터진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다. 구원3파가 언론에 노출되었다면 다른 종파를 급조할 도리밖에 없는 일, 설령 여기서 일이 잘못된다 해도 재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인들이 습성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을 제압할 방안은 항상 우리 곁에 있으니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히기 위해선지 미우라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문밖에서 보고가 날아들었다.

“사장님, 박사주란 놈이 나왔습니다.”

“그냥 둬. 자연스럽게 2층으로 갈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게. 그자의 법술이 어느 정돈지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네.”

짧은 대답 소리와 함께 이내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움직임이 민첩했다.

미우라의 시선이 닿아 있는 CCTV 화면은 바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복도였다. 그곳엔 몇 개의 조각품이 치장되어 있었다. 한쪽엔 날개달린 천사가, 건너편엔 사천왕상이 귀기를 흘리며 박사주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박사주의 동작이 멈춘 것은 지하 2층의 복도 중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활짝 열린 예배소에는 책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횅하니 비어 있고 가장 앞쪽엔 삼단으로 쌓아올린 제단에서 향불이 피어올랐다. 붉은 단을 깐 길이가 10여 미터는 좋이 됨직하고 폭이 1미터 남짓한 사각 탁자가 제단 앞에 놓여 있고 양쪽 끝에는 범과 호랑이로 조각한 등나무 의자가 놓인 채였다.

상대의 기척을 느끼고 제단 앞에 앉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구로다였다. 그는 사각 탁자의 한쪽 끝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오랫동안 만나고 싶었는데 참으로 반갑소.”

박사주는 미소로써 답변을 대신했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난 모양이오. 온통 매스컴이 떠들어댄다는 것을 듣고 있었소. 내 예감이오만 미우라는 나를 제거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이미 받았을 것이오.”

박사주는 어리둥절했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박사주라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나는 반평생을 조선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조선사람이 됐는지도 모르겠소.”

“?….”

“나는 여인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없는 위인입니다. 그렇기에 조선에 있을 때도 늘 혼자였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소. 나와 함께 근무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 여동생이 미인이었어요. 어느날 남산에서 만나자는 약속에 장소로 나갔어요. 나이는 내가 위였지만 남녀 관계만큼은 친구 여동생이 한참 고수라고나 할까요.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이의 이끌림에 따라 말려들어간 거죠.
산중에서 그 아이와 관계를 가졌는데 내용이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더니 나에게 아주 험한 말을 한 거요.”

구로다는 그때를 생각하는지 사르르 눈을 감았다. 순간처럼 흘러가는 지난 세월의 영상, 그것은 나이 어린 계집애가 자신에게 병신이라느니 고자라는 등의 모욕을 주는 그림이었다. 과거에서 깨어난 구로다의 말은 풀기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밀어버린 겁니다. 언덕 아래 굴러 떨어진 그 아이는 당장엔 죽지 않았어도 며칠 지나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거든요. 물론 친구는 나를 의심했지만 시치미를 뗄밖에 도리가 없었어요. 친구는 나에게 행패를 부렸죠. 자기 여동생을 죽였다는 걸 고백하라고 하루도 빼지 않고 으름장을 놓았어요. 참다 못한 나는 어느 날 그 놈을 처치해 버린 거요.”

그런데 고약한 일이 일어났다고 구로다는 두려운 빛을 나타냈다. 선녀보살 도화녀가 여섯 살배기 계집아이의 혼백을 불러들여 신접(神接)이 이뤄지면서였다. 윤사달을 찾기 위해 집에 들른 구로다는 뜻밖에 도화녀의 신통력을 시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죽은 친구의 원혼이 찾아와 구로다를 힐책하고 나선 것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도화녀의 가슴에 권총을 난사시킨 사고를 저질렀다.

“세상 사람들은 구로다 가문을 ‘무당 집안’이라지만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해방 이후 내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아내의 청에 의한 것이지 내 뜻은 아니었어요.”

갑자기 구로다는 아내에 대해 꺼내들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왔던 그가 왜 나이 들어 아내를 거둬들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실마리는 그에게서 풀려나왔다.

“그러니까, 윤사달의 부인을 죽인 그날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도화녀의 주검만 앞에 있을 뿐 동행했던 부하들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소. 난 몇날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소.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게 아니고 잠을 청해도 내 의식의 반은 어디론지 빠져나간 상태였으니까.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소. 이때 아내가 나를 찾아온 거요.”

그녀는 국사당에 머물렀다는 무당이었다. 간밤에 몸주께서 현신하여 죽음에 처한 구로다를 구하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흘 동안 굿을 했다. 구로다의 영혼을 위협하는 혼백을 불러들여 아름다운 옷과 향기로운 재물을 차려놓고 이승에서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한시도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된 게요. 내가 살기 위해선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본국으로 들어가 함께 살자는 내 애원을 그녀가 받아들인 것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한 후였어요.”

조건 중의 하나가 일본에서 삼합회(三合會)를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이 살아있는 한 한일관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삼합회, 이것은 일본에서 그녀가 신내림을 받은 처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가르침을 내린 단체였다. 그녀는 일본에 건너간 후에도 자나깨나 조선을 잊지 못했다. 그녀에게 몸주가 빠져나가고 신통력이 사라지자 그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구로다가 한숨 속에 들려준 얘기의 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