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모텔 505호. 박사주는 소파에 몸을 묻힌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주식회사 무극에서 시판하고 있는 ｢무후별주｣였다. 향이 독특한데다 벌꿀을 가미해 젊은 층의 인기를 끌고 있는 술이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톤이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 왔다. 마상섭 대령이었다. 잠시 전에 통화 했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안돼서인지 다시 전화를 넣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웬만하면 그 자릴 피하십시오. 굳이 어려운 일을 자청할 필욘 없지 않겠어요.”

“아닙니다. 오늘밤 묵은 은원을 풀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술잔을 집어 입술을 적셨다. 시간은 7시 5분전이었다. 사르르 눈을 감은 그의 귓가에 다급한 게이꼬의 목소리가 숨 가쁘게 다가왔다.

“505호 손님이시죠. 사고가 났어요. 어서 피하세요.”

내용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일이 뒤틀렸는지를 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내 남녀가 들어왔다. 깨끗한 정장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방에 들어온 후 뜻밖이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은 박사주가 웃는 얼굴로 반겨 왔다.

“어서들 오시오,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소.”

처녀의 손길이 숨겨 온 독침 쪽으로 움직이려는 것을 스포츠머리가 저지했다. 그는 다소곳이 소파 쪽으로 움직이며 처녀를 이끌었다. 그들은 널찍한 소파 건너편에 앉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하늘이 만들어 준다는데 우리도 그런가 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볼 수 있다니 인연치곤 고약하지요?”

스포츠머리의 기색이 들썩였다. 자신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미 어떤 방비가 마련됐다는 증좌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인다는 건 오히려 이쪽의 약점만을 노출시킬 수 있다. 외부에 어떤 대비를 했다 하여도 박일우를 인질로 잡으면 그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퍼뜩 정신이 든 것은 박일우가 잔을 들어 권하면서였다.

“바쁜 걸음도 아닌 것 같으니 우선 술이나 한잔합시다.”

권하는 잔을 스포츠머리는 선선히 받아 마셨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서미애씬데 어쩐 일이십니까. 변동 사항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 분은 오지 못합니다.”

“그렇담 할 수 없죠. 내가 이곳에서 기다린 것은 두 분이 어찌 나올 것인가에 방비가 됐다는 얘기죠. 어떻습니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든 그 뜻을 되돌린다면 문제를 삼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만.”

스포츠머리가 섣불리 움직이려는 처녀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저지시켰다.

“흔한 말로 당신네들을 ‘얼룩고양이’라고 하죠. 남자 분과 예전에 함께 온 분은 히라다라는 신도교 교령이죠. 그는 얼마 전 신도교를 탈퇴하고 나와 일합니다. 예전에야 약물에 중독이 됐으니 이지력을 상실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보아하니 한국분 같은데?”

“유종원입니다. 이쪽은 미시마 양이구요.”

“한쪽은 얼룩고양이, 다른 쪽은 공이오구란 얘기죠? 여러분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손치더라도 돌아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어쩌면 건조 실험에 처해질지도 모르죠. 왠 줄 아십니까, 바로 구로다라는 무당의 영력(靈力)을 높이기 위해서죠. 어떻습니까, 이쯤에서 손을 떼시는 게.”

유종원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 동안 저지른 여러 가지 일들을 종합해 볼 때 마음자리가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화장터에서 사람의 몸을 태워 그 뼈를 추려 낼 때의 기분과 흡사할 것 같았다.

이들이 들어와 있는 방. 겉으로는 지극히 평안한 이 방엔 뜻밖의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제갈량의 팔진도를 축약한 육화진(六花陣)이었다. 이 진법은 오죽헌의 밀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익혔던, 아주 흥미진진한 진법이었다.

전쟁에 나갔을 때의 육화진은 보병과 기병으로 진을 형성한다. 진의 형성에 있어서 여타의 진법과 달리 넓거나 좁거나를 가리지 않고 진을 형성할 수 있다. 즉, 작은 숫자인 수(銖)로 일(鎰)을 물리치는 병술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는 저울 눈금의 100분의 1의 분수(分數)를, ‘일’은 24량을 헤아리는 저울 눈금을 말한다. 이 진법은 곁에 있어도 느끼기가 어렵고, 멀리 있어도 곁에 있는 것 같은 허허실실의 병진이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진 지금에 와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얼룩고양이’ 팀과 ‘공이오구’ 팀을 구하지 않는 한 그들은 값없는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두 분께서 마음먹기에 따라 애꿎은 생명들이 헛되이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서대문밖 황극경세원에 있습니다.”

박일우는 그 말을 떨구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