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서 시작되어

김시우는 몹시 화난 표정으로 서미애를 다그쳤다.

“자료실 컴퓨터를 쓰게 한 것은 당신의 실수였소. 관리인들은 두 사람이 작업 중이었다는데 그들이 누굽니까?”

“글쎄, 난 모르는 일이라잖아요.”

김시우는 이죽거렸다.

“홍사패를 보여줘 자료실을 열람시켰단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회장 부속실엔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는 걸 아시고 계시죠? 한 놈은 H신문 사회부 기자 김순원이고 한 놈은 누구요?”

서미애는 풀기 없는 목소리로 계속 부정했다.

“난 그날 게이꼬 씨와 밖에 나갔어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거죠? 설령 잘못됐다 손치더래도 그건 사장인 나의 권한이에요. 당신은 자금 담당 상무에 불과하잖아요.”

김시우가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우뚝 멈춰 섰다.

“당신이 할 일은 주주총회에서 회사가 왜 망해 가는지 왜 외국 회사와 합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심도 있게 설명하는 것으로 배역은 끝나게 돼 있어. 그런데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어 분란을 일으키니 그게 문제지. 이것 봐, 서사장.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장발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놈이 누구요?”

“···.”

“MS29라는 내 아이디 넘버까지 넘겨줄 정도면 한두 번 스친 안면은 아닌 것 같잖아?”

“글쎄 나는….”

“그 자가 히라다가 아니라는 건 당신이 잘 알아. 괜히 억지 부려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

“그 자가 보았던 파일은 ‘케이투 프로젝트’야. 쉽게 파고 들어간 것이 의문이거든. 회원 관리야 그렇다지만 ‘케이 투 프로젝트’는 단어 입력 코드를 또 하나 만들어서 뚫고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아.”

그렇다 해도 기본 아이디 없이는 파고들 수 없다는 점에서 서미애를 추궁했다. 그는 부산에서 돌아온 후 자료실 관리인으로부터 보고 받고 즉시 비디오를 검색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료실에 들어와 일 처리하는 과정이 서미애와 내통 없이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됐다.

“아무리 부정해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서사장이 약속을 어긴 거니까. 마지막으로 묻겠소. 김순원 기자와 함께 온 자가 누구요?”

서미애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김시우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강요는 않겠소. 이젠 서사장과 인연은 끝난 것으로 알겠소. 이제부터 비디오나 한편 보시죠.”

김시우는 리모콘을 들어 티브이의 전원을 켜고 플레이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즉시 살아 돋았다.

화면 속엔 서른은 안돼 보이는 앳된 여인이,  약간 폭이 넓은 식탁용 의자에 앉은 채 두 다리와 몸이 묶여 있었다. 처음부터 반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화면 속의 여인도 신도교의 인물로 생각되었다. 김시우의 설명이 떨어졌다.

“저 여자 이름은 이경실. 음, 주식회사 무극이 있기 전의 회사, 다시 말해 ‘주식회사 미로’의 사장 문치수의 부인이오. 문치수는 사업 실패로 자살하고 덕분에 이경실은 미망인이 되어 숨어 지냈소. 저 여자가 일 처리하는 과정에서 위자료로 받은 삼남 지역의 땅을 자신이 착복하기 위해 숨어 지낸 것으로 보고됐소.”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역시 여인의 행색과 같은 모습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저 사내 역시 마찬가지요. 우리의 계획대로 문치수를 도산시키고 신도교로 돌아와야 됨에도 은밀히 이경실과 동거에 들어가 본연의 업무를 망각한 박도식이오. 교도가 지켜야 할 수칙을 어겼으니 혹독한 책벌을 피할 수 없게 됐소.”

화면이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자 뒷설명이 따랐다.

“교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을 어기면 책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이경실의 경운 가장 금기시하는 본교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려는데 있었소. 그런 점에서 중벌을 피할 수 없었던 거요. 어떠한 책벌이 있는지는 서사장께서 직접 느껴 보시죠.”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묶여 있다는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닐 테지만 크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줄기차게 땀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화면으로 봐선 앉아 있는 곳이 덥다는 것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곧장 옆방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구조는 상당량의 열기구들이 전후좌우로 설치되어 있었다. 건조실이었다. 그녀가 누군가에 의해 건조실 입구에 오자, 마치 자동 시스템 위에 올려진 세차장의 자동차처럼 앞으로 주욱 밀려 나갔다.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땀은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그녀는 다시 처음 앉았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김시우의 설명이 떨어졌다.

“저긴 반복되는 곳이오. 열기를 쏟아 내는 방에서 비오듯 땀이 흐르면 곧 건조실로 옮겨져 몸을 적신 땀을 건조시키죠. 이렇게 되면 몸안의 수분이 빠져 일주일 안에 살아 있는 미이라로 변하죠.”

비로소 서미애는 바동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반죽음이 되어 파랗게 질려 버렸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김순원과 함께 있던 자가 누구요? 강요는 않겠소. 당신이 생체 미이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게요.”

“말, 말하겠어요.”

“누구요?”

“박일우란 사람이에요.”

“박일우? 어디서 뭘 하는 놈이오?”

“그건 몰라요. 예전엔 ｢스캔들｣ 잡지의 취재부장이었어요. 누군가에게 납치돼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김시우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박일우, 기억에 남는 이름이었다. 이경실과 문치수의 틈에 끼어 죽음의 사자로 불리는 ‘얼룩고양이’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내, 박일우였다. 그 당시 일을 진행했던 ‘얼룩 고양이’는 저격수 히라다(平田)였다. 그렇게 본다면 얘기가 고약했다. 기미꼬를 처리하러 간 히라다는 나타나지 않고, 히라다로 신분을 위장한 박일우가 나타나 ‘케이 투 프로젝트’의 비밀을 빼낸 건 일이 꼬이고 있다는 증좌였다.

김시우는 즉시 ‘얼룩고양이(斑猫)’ 팀을 호출했다. 그 팀은 히라다의 빈자리를 유종원(柳宗元)이라는 이가 옮겨 앉고, 대신 공이오구(0259) 팀에서 미시마(三島) 양을 착출해 혼성팀을 만들었다. 이것은 기존 팀이 사고로 조를 이루지 못할 때 자동적으로 구성되는 팀 전략이었다.

“참으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 사이비 기자와의 인연이 이렇게 질기다니 나도 놀랐어. 박일우라…. 재밌어, 정말 재밌어.”

김시우는 손바닥을 탁 마주치더니 성큼성큼 주위를 맴돌았다. 몹시 흥미로운 게임을 앞둔 그의 버릇이었다.

얼룩고양이들이 도착한 것은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남녀는 방안의 풍경과는 상관없이 정면을 주시한 채 반듯하게 섰다. 사내의 모습을 본 서미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동행했던 사내와는 달리 약간이나마 인정이 묻어나던 스포츠 머리였다.

“유종원이라 했는가?”

“그렇습니다.”

“미시마 양과 한 조를 이뤘다구?”

“그렇습니다.”

“예전에 파라다이스란 곳을 찾아간 적 있나? 충무로에 있는 모텔이었지. 아마 505호였던가?”

두 눈을 끔뻑이던 유종원의 동작이 다시 굳어졌다.

“그런 일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기 앉아 있는 분을 보게. 안면이 있으신가?”

유종원은 시선을 그쪽으로 모았다. 일순 감전된 듯 몸이 굳어졌다. 분명 자신들이 살려줬던 505호실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벽엔 그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집무를 보는 사진이다. 유종원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는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저 분은 우리 회사 서미애 사장님일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으로 보아 크게 놀란 듯싶었다.

“서사장께선 회사의 기밀을 유출시켜 벌을 받고 있는 중일세. 그러니 가엽게 생각할 필욘 없어. 그런데 말이야, 유종원씨. 히라다와 함께 처리한 그날 밤의 대상물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일세.”

“예에?”

김시우는 비디오 화면에 전원을 넣은 후 박일우의 모습에 고정시켰다. 백색의 장발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양새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저놈 이름이 박일우지. 예전엔 ｢스캔들｣이라는 잡지의 취재부장을 지냈어. 거기 근무할 때 서사장과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까.”

서미애의 낯빛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지금까지의 행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출된 채 김시우의 손안에 주물러지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보면 오래 전에 자신은 표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죽었다던 놈이 버젓이 살아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닌가. 더욱 놀랄 일은 자네와 한 조를 이룬 히라다의 행방이 묘연하단 말일세, 더구나 박일우란 친구가 히라다를 사칭하고 나타났으니 일이 재밌잖아.”

“?….”

“유종원씨, 난 더 이상 유령을 보고 싶지 않네. 무슨 일인지 알겠는가. 이번만은 확실히 처리해 주게. 아무리 흥미로운 게임이라도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얼굴은 식상한단 말이야.”

그들이 나가자 자료실 관리자들이 들어왔다. 김시우의 눈짓을 받고 한 사내가 마취 수건으로 서미애를 제압했다. 묶인 줄을 풀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서둘러 비상구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