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다는 저격수로 사업적인 수완은 없는 위인이야. 그의 심성은 오죽 선생님의 침술로 어느 정도 교정되어 가는 모양이오. 문제는 쓰노다 기꾸오인데, 그 자는 지금 주식회사 무극의 자금당담 상무로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 내가 갑자기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김기자가 나서주어야겠소. 은밀히 서미애 사장과 접촉해 나를 초빙하는 형태를 갖는 것도 좋고.”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어요. 김시우란 자는 부산에 내려가 있거든요. 지난 주 입국하기로 한 이상철 회장이 웬일로 대만에서 꿈쩍도 않는답니다. 아예 연락을 끊었나 봐요. 대도그룹이 삼합회 쪽으로 먹혀 들어가니까 방법을 달리 하기로 한 모양이죠. 대도그룹 이회장이 승부수를 던진 것 같아요. 죽 쑤어 개 좋은 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삼합회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정부에 헌납해 버리겠다는 뜻을 비쳤나 봐요.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마순호 대령이 세무조사를 추진하고 있나 봅니다.”
“구로다나 미우라 쪽은 어떻답니까?”
“구로다는 행방이 묘연해요. 신문사에서 나오기 전 공항 쪽에 체크 했는데 아직 출국했다는 흔적은 없어요. 미우라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것으로 본다면 안전 지대에 숨어 있겠죠. 잘해야 일본대사관이 아니겠어요. 구로다의 체포는 마상섭 대령이 전담키로 했나 봅니다. 그러나 미우라에 대해선 혐의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차암, 마충길 대령은 단신으로 오늘 아침 미국으로 출국했어요. 발등에 떨어진 불을 진화시키려면 당사자가 발을 빼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죠.”
“어쨌든 서둘러 봅시다.”
이즈음, 서미애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실체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시각각 조여드는 보이지 않은 끈은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우그러뜨렸다. 그럴 때마다 위안이 되는 것은 2주일전 미우라 사장의 소개로 비서실에 근무하게 된 게이꼬(京子)와의 대화였다. 언젠가 점심을 마치고 커피를 나누었을 때 게이꼬는 그렇게 말했었다.
“사장님, 오해하지 마세요. 전 이곳에 오래 근무할 수는 없거든요. 미우라 클럽에 근무하던 언니가 얼마 전 실종됐거든요. 언니에게 연락 올 때까지만 근무를 하겠습니다. 미우라 사장님한테두 그렇게 말했구요.”
그녀는 커튼을 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정원 쪽에 머물고 있었다. 눈부신 빛살을 한 손으로 가리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온몸이 지근거린 것은 이상철 회장의 분노에 찬 통화 때문이었다.
“내가 서사장을 믿고 회사를 맡긴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이게 뭔가, 회사의 2분의 1은 시미즈 그룹으로 넘어간 상태니 장차 그놈들이 먹어 치우는 건 시간문제잖아. 더구나 이건 뭔가, 아무리 사내의 품이 그리워도 그렇지 이렇듯 포르노를 찍어 내게 보낸 의도가 뭐야. 김시우 상무하고 좋은 시간 보낸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이런 걸 내게 보냈는가 말이야. 누구 복장 터져 죽는 걸 보고 싶다는 거야 뭐야?”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부산으로 출장가면서 김시우는 그런 말을 했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사장님과 난 별다른 근심 없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그러나 김시우에게서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스쳐가는 듯한 섬뜩함이 엿보였다. 이거다 하고 선을 긋지는 못했으나 분명 어떤 것이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고 게이꼬가 들어왔다.
“사장님, 외부 전홥니다. 김순원 기자시라는데요.”
“김순원기자?”
“받아 보면 아신답니다.”
서미애는 연결하라는 말을 하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전 H신문 김순원 기잡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이 있어 서사장님을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전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자 선생 마음대로 하세요.”
“잠깐만요, 전화를 이대로 끊으시면 크게 후회하시게 됩니다. 에, 지금 제 데스크엔 서사장의 좋지 않은 부분들이 비디오로 녹화된 채 들어와 있습니다. 이걸 신문에 그냥 내보내도 괜찮단 말씀이십니까?”
“…….”
“전 조금도 서사장님을 곤란하게 해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만을 가리려는 겁니다. 물론 밝혀진 내용에 대해서는 서사장님의 허락이 없는 한 게재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저를 만났을 경우에 한해섭니다.”
“원하는 게 뭔가요?”
“인터븁니다. 다른 이윤 없습니다.”
“좋아요, 언제 오시겠어요?”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예에?”
“여긴 아래층 공중전화 부습니다.”
“좋아요, 사장실로 오세요.”
아닌 게 아니라 김순원은 금방 올라왔다. 그의 옆엔 백색 장발인 사내가 선글라스를 쓴 채 앉아 있었다. 준비된 차가 탁자 위에 놓일 때까지 서미애는 자신의 책상에서 가벼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10여 분 쯤 흘러 그녀는 소파로 건너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집행할 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아주 보기 좋습니다. 서사장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거든요. 사장님께서도 바쁘신 것 같으니 몇 가지만 간단히 묻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노 코멘트예요.”
“그렇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사장님을 뵙고자 한 건 아주 특별한 일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보 채널을 통해 알아낸 바론 ‘케이 투(K-2)’ 프로젝트라 하거든요.”
“케이 투 프로젝트? 그건 처음 듣는 용언데요.”
“그럴 겁니다. 저희도 조금 전 정보기관으로부터 입수했으니까요.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쓰노다 기꾸오란 사내거든요.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일본국의 신도교 총령이죠. 나이는 이제 서른이 채 못됐지만 지략이 무척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쓰노다 기꾸오? 글쎄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아참 그렇게 말하니 모르시죠. 한국 이름으론 김시우(金豺雨)죠. 아주 잔인하고 표독스러워 승냥이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자금 담당 상무로 근무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예에?”
“그 자가 삼합회와 연계하여 대도 그룹과 주식회사 무극을 통째로 삼키려는 공작을 펴고 있습니다. 우린 대만에 계시는 이회장님에게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쪽 신화원이라는 주정(酒精) 회사와 손을 잡고 재기를 도모하려는 계획중이더군요.”
“예에?”
“다시 말해 이 회사는 알맹이가 빠져나간 빈 껍데기란 뜻이지요. 믿어지지 않으시더라도 믿으셔야 합니다. 이상철 회장님의 연락을 받고 그 동안 우리 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미 이 회사의 모든 지분은 미우라 클럽과 시미즈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이를테면 위장 분산이죠. 일차적으로 세무조사를 단행할까 싶었는데 일단 서사장님을 만나 뵙고 난 후 결정할 문제로 보고 보류해 둔 상탭니다.”
“그럼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나요?”
“그렇다고 봐야죠. 협조하기에 따라 방법을 마련할 수는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김시우의 모든 자료를 우리에게 공개해 달라는 겁니다.”
“모든 자료를요?”
“그렇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설령 회사를 문 닫는 한이 있더래두요. 김상무가 하는 일이 특수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자료를 공개했을 때 회사 전체가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있거든요.”
“저희가 알고 싶은 것은 좀 전에 말씀 드린 ‘케이 투 프로젝트’에요. 다른 자룐 일절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던 회사의 모든 기밀 사항은 무덤까지 가져갈 약속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안돼요. 어느 회사건 망하는 것보다 밖으로 알려지는 게 더 곤란한 일이 있거든요. 저 역시 그런 일이 발생해 이상철 회장님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요. 이번엔 제가 부탁 드려야 될 것 같네요. 저희를 생각하신다면 길바닥에 나앉을 그때까지 가만 내버려두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김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뜻밖의 행동에 서미애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갔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보았음직한 윤곽인지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입가에 미소를 뿌리던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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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