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K-2’

“김기자님이시죠, 전 심문긴데요. 급히 좀 만났으면 해서요. 예에,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요 뭐. 해독약을 먹지 못하나 칼에 찔리나 죽기는 매일반이죠. 예에, 그러죠. 두 시간 후, 종로의 파고다 공원 팔각정에서 만나시죠. 예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순원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급히 점퍼를 걸치는 그를 향해 모두들 의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침 회의 때 편집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말라는 편집국장의 지시가 떨어진 것은 테러의 위협 때문이었다. 불 아지처럼 날뛰는 김순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집국에서는 자체적으로 그를 보호 · 감찰하는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2인 1조가 되어 그를 그림자처럼 지키게 한 것이다.

김순원이 낯선 사내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때마침 편집국장이 모 기관에서 온 두 명의 신사와 잠시 외출 중일 때였다. 일단 황극경세원으로 전화부터 걸었다. 박사주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찌렁 하니 들려 왔다.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이오, 김기자!”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사방에서 날 잡으려 혈안이 됐다니까요. 넓고 넓은 서울 땅에 내 몸 하나 간수할 곳이 없으니 참으로 눈물 납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예에?”

“아직 명수(命數)가 많아요.”

“그게 무슨 말인데요?”

“죽지 않는단 얘기죠. 그러나 지혜(知)를 팔 때면 반드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돼요. 지혜라는 것은 입(口)으로 화살(矢)을 날리는 것과 같으니 어느 쪽으로든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조심해요.”

“그러죠.”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순원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누군가 뒤따르는 기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파고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도 망설이거나 불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곧장 팔각정으로 향했다. 두툼한 오리 털 파카를 걸친 사내가 아는 체 했다.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는 50의 중년인이었다.

“심문기 씨죠?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김순원이 악수를 사내는 정겹게 받아들였다.

“나는 기자 선생의 용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기사인데.”

“지나간 일입니다, 우리 다른 얘길 하죠. 급히 만나자는 이윤 뭡니까?”

“짐작하셨겠지만 범행 현장엔 저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문소장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송현국이라는 영화배우가 문소장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김삼렬이가 일을 꾸몄습니다만, 그가 간 다음 내가 동목인을 넣었거든요. 은인에 대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서죠.”

심문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피어 물더니 깊이 빨아들였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품안에서 대학 노트 반절 크기의 금전출납부를 꺼내 김순원에게 건네주었다.

“처음엔 이걸 그 분의 따님에게 전할까 했어요.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어요. 그 분에게 이걸 전해도 도움이 될 건 없다고 본 거죠. 마음만 상할 뿐 어떤 해결점을 찾는다는 건 어려워요. 그래서 기자 선생을 뵙자 한 겁니다.”

김순원은 금전출납부를 펼쳐 들었다. 거기엔 자전 형식의 고백이 촘촘히 씌어 있었다.

<내가 일본에서 온 낯선 손님을 따라 신도원에 온 것은 오랜 친구 나가시마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가 한국에 왔다면 가장 먼저 나를 찾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나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남묘호렝게교의 교인으로 위장시켜 신도교도(神道敎徒)들의 추적을 피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중에 발각되었지만···.>

앞부분은 거의 신변잡기였다. 전라도에 두고 온 딸(김송자)에 대한 궁금증과 애련(哀憐)이 눈시울을 적실 만큼 절절히 그려져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적혀 있었다.

<나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할 때, 문서과로 옮기기 전 후생국에 근무했었다. 물론 내 친구 나가시마를 만난 것은 문서과였다. 그런데 신도교 관계자들이 무슨 이유로 날 데려왔는지는 한 달이 지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후생국에 근무할 당시 취급했던 비밀 문건 때문이었다. 당시 만주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악명을 떨친 ‘관동군 화학부 제516부대’와 관계가 깊었다.

물론 후생국에 근무할 당시엔 그런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고 씌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