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술과 여자로 당신의 몸을 망가뜨렸대요. 신쥬꾸에 있는 어느 유곽에서 어머니를 만나 살림을 차렸답니다. 저희 자매를 낳을 무렵은 부친의 건강이 엉망이었던 모양이에요. 가끔 조부님이 찾아와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놓고 갔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죠.

아마 조부님이 두 번째로 부친을 만났을 무렵이래요. 부친은 품안에서 아주 오래된 지도 한 장을 꺼내주더랍니다. 그것은 남악의 위치와 금괴가 묻혀있는 지형도였죠.”

그 후 풍수사 김창원은 피를 두 되 남짓이나 토해낸 채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날 샤미생을 치며 애처럽게 ‘꽃 이야기’라는 곡을 부르던 어머니는 자녀를 놓아둔 채 극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저희가 나가시마 조부님에게 입양된 것은 이같은 소란을 거치고 나서였죠. 당시만 해도 나는 웬만큼 지각이 깨어있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어요. 비록 세 살 차이었지만요.”

부친의 죽음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부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우호적인 한국관(韓國觀)을 가진 게 잘못일 수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구로다의 비행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일본 무당의 피를 받은 구로다는 삼합회(三合會)라는 사조직을 운영하여 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각 분야에 뛰어들어 목적하는 것을 얻기까지 조직적으로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다 그것이 먹혀들지 않을 때엔 거침없이 테러했다. 그러한 구로다의 비행 중 가장 소름끼치는 대목이 명도(明圖)였다.

“구로다가 오늘날의 명예와 부를 이룬 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가 땅을 적셨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신의 예지력을 높이기 위해 애꿎은 어린애들을 납치해 그들을 굶겨 죽인 후 혼을 받아내려 날뛰었어요. 그러다보니 열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납치되어 영문도 모르게 죽어간 사건이 한동안 일본 열도를 경악시켰죠. 흥미로운 건 이 사건의 수사팀들에게 격려금을 지불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위로한 게 바로 구로다였어요.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얘기예요.”

그녀 역시 처음에는 구로다를 죽이기 위해 삼합회에 들어갔다고 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일정한 기간에 맞춰 본부에서 내려주는 약을 먹지 않을 때엔 몸에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내가 살기 위해 ‘빛의 사자’라 불리우는 공이오구(0259)에 들어간 거죠. 조건은 동생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어요. 그 아이까지 억울하게 생을 마감케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조부님의 성함은?”

“나가시마 고오따로(中島河太郞) 씨죠.”

송학수가 반색했다.

“그럼 동생은 게이꼬(京子)인가.”

“제 동생을 아세요?”

“내가 만난 건 아니지만 참으로 묘한 인연이구만. 박사주의 장인 벽암 선생과 전라도에 있는 주말농장을 찾아갔다고 하더구만. 얼마 전에 들었지.”

“혹시 김경필 씨가 주인인?”

“그래요, 그 분을 알아요?”

“제 부친과 사촌간이라고 들었어요. 부친이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강유선이란 분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그곳에 내려와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고 들었거든요. 그 조건으로 사촌인 김경필 씨에게 땅을 넘겨 준 거구요.”

기미꼬는 힘없이 덧붙였다.

“그 애가 나를 따라 한국에 왔었지만 독자적인 행동을 해왔어요. 이유는 조부님이 남기신 보물지도 때문이었지만요. 일본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과외시켜 돈을 모은 것은 아버님의 첫사랑인 강유선 씨를 찾으려는 의도였어요. 서울에 온 후 동생은 흥신소를 찾아가 그분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거나 직접 나서기도 했을 거예요. 지금쯤은 강유선 씨의 측근을 만나 회포를 풀었겠지만요.”

기미꼬가 찾는 상대가 김송자인 것을 알았지만 송학수는 굳이 내색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동안 일본 관광객들이 한국에 들어와 전라도로 직행한 것은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들은 한결같이 남악과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웠거든. 그러다가 얼마 전 ‘남악과 보물지도’라는 게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았네. 그건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진짜 남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으로 밝혀졌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데요?”

“보물지도가 엉터리란 거지.”

기미꼬가 정색했다.

“아녜요 선생님. 그건 선생님이 잘못 아신 거예요. 보물은 있었어요.”

“있었다니?”

“예에, 있었어요”

“어허,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도 보물 지도라는 걸 전문가들과 의논해 진위를 살폈네. 의견을 많이 나눴지. 풍수전문가들이 자리를 함께 했지만 결론은 지도가 잘못된 거였네.”

기미꼬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골똘해 지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맘속으로 어떤 결의를 다진 게 분명했다. 그녀는 한쪽으로 몸을 튼 채 하복부에서 붉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아주 얇은 기름종이에 세필(細筆)로 그린 산도(山圖 ; 지형도)였다.

그 그림은 신년 벽두에 최경조 교수 집에서 오에이치피(OHP) 위에 올려놓고 보았던 지형도였다. 당시 최경조 교수는 삼합회 소속의 일본인이면 누구나 한 장은 지녔다는 보물지도라 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예전에 것과 다름없는 그림이었다.

“내가 보기엔 전연 다른 게 없어. 산의 위치나 동그라미며 삼각표시가 아주 흡사해.”

기미꼬가 싱긋 웃었다.

“다른 곳이 있어요.”

“다른 곳이라?”

기미꼬는 오른손 검지 끝으로 지도의 상단부를 짚었다. 그곳엔 아주 작은 글씨로 몇 행이 끼적여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내용을 식별할 수 있었다.

어찌하여 봉황이 나는가

바람이 불면 왕버들은 새의 깃처럼 펄럭이니

둥지에 담긴 알이 흔들리누나

나는 언제 한마음으로 석등에 불을 켜리

제목은 <보름 날밤 자정에는>이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은 없었다. 송학수는 지도를 노려보았다. 지세(地勢)며 산세는 영락없는 제비산과 금산사였다. 그리고 중심점은 정여립의 생가였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도를 박사주에게 건넸다.

“박사주가 한 번 보시오. 내 눈이 틀림없을 터인데 아니라 하니 뭔가 착오가 있을 터인데.”

“지형을 그린 산도야 얼마든 착오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곳에 쓰인 시문대로면 정여립의 생가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 어떻게?”

“전라북도 김제에 금구(金溝)란 곳이 있습니다. 물론 이 지형도를 그린 시기가 오래됐기 때문에 아직 그런 지명이 남아있는진 모르겠지만, 산도는 봉두산(鳳頭山)을 가리키는 게 분명합니다. 일제시대엔 이곳을 금구현(金溝縣)으로 불렀는지 조사해보면 알겠지요. 지도의 위치나 쓰인 글귀의 정황으로 보면 봉두산이 진산임엔 틀림없네요.”

송학수는 내심 혀를 찼다. 아무리 젊은이들이 하루 다르게 학문이 일취월장한다지만 ‘박사주’를 보고 있으면 신비롭기까지 할 정도였다. 점법과 기문(奇門)은 그렇다 치고 풍수지리술까지 뛰어난 것은 전연 예상 밖이었다. 그의 예리한 지적이 이어졌다.

“산의 모양은 봉황이 나는 형상이었을 겁니다. 이른바 비봉형(飛鳳形)이었겠지요. 그렇기에 지형도에 ‘어찌하여 봉황이 나는가’라는 말과 부합되죠. 그리고 ‘바람이 불면 왕버들은 새의 깃처럼 펄럭인다’ 했으니 왼쪽에 있는 양시산(楊翅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둥지에 담긴 알이 흔들린다’는  것은 오른쪽에 있는 난산(卵山)의 비유이고 마지막으로 ‘나는 언제 한마음으로 석등을 켜느냐’고 탄식한 것은 이곳 어디에 돌로 만든 등이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비봉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풍수적으로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석등을 세워 염승한 것이구요.”

이번에는 기미꼬가 놀라버렸다. 마치 보고 온 것처럼 자세하게 그려내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그곳에 개동사(開同寺)라는 절을 세웠답니다. 그러니까 ‘한마음’이라는 말이 나온 거죠. 나머지는 박사주님의 말씀과 같아요. 보물은 그곳에 있었어요.”

“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면, 절안에 묻혔을 것인데 어느 곳이란 말인가?”

“시구의 제목이에요.”

“시구의 제목? 제목이라면 <보름날밤 자정에는>인데. 추석명절인가? 아니면.”

“정월 대보름이에요. 그날 불을 피워 쥐불놀이를 하니까 왕버들이 새의 깃처럼 펄럭이고 둥지에 든 알이 위태롭게 흔들린 거죠.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불을 밝히면 석등의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죠. 보물이 묻힌 곳은 바로 그 지점이었어요.”

“보물을 찾았는가?”

“찾기는 했었지요. 붉은 벽돌을 사각으로 쌓아올려 일종의 방공호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계획했던 것 같앴어요. 창고로 쓰였던 자리는 열다섯 평 남짓으로 높이는 열두 자 정도였죠. 그곳에 금괴를 놓아두었다면 양은 상당했을 거예요.”

송학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미꼬는 멈칫거리며 뒷말을 붙였다.

“내가 그곳을 찾아간 것은 미우라(三浦) 상의 배려였어요. 공이오구라는 자폭대가 되어 김성진 의원님을 찾아 떠나기 며칠 전 보물이 묻힌 지점을 알려준 거죠. 물론 그 금괴가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엔 물을 수도 또는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다만, 그런 물건이 조부님 유언처럼 한국에 있었으며 그것이 대일본 제국을 위해 값지게 쓰일 거란 생각만 한 거죠. 그러니 미련이 없었죠.

아참,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어요. 우리가 그 장소에 갔을 때 사내 두 사람이 죽어 있었어요. 무슨 흥신소를 운영하는 소장이라는 명함이 지갑 속에 있더라구요. 어떻게 피살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요. 또 알고 싶지도 않구요.”

기미꼬는 지쳐 있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의식의 저쪽 건너편엔 또 하나의 불안감이 똬리를 틀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황극경세원으로 침입한 히라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저어기, 송선생님.”

“말해봐요.”

“김성진 의원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음, 모르긴 해도 가택연금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신기섭 의원도 마찬가지고. 가만, 내 그런 얘긴 한 번도 묻질 않아소만, 혹시 귀암(龜岩) 허련(許蓮)이라는 함자를 들어보았소?”

기미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살아 계신가? 아는 대로만 말해 봐요?”

“제 짐작엔 돌아가셨다고 봐요. 아녜요 살아 계신지도 모르죠. 돌아가셨다고 보는 건 제 짐작이에요.”

“어디서 그 분 함자를 들었는가?”

“한국에 와서 그분의 동목인도 보았구요. 동목인은 죽은 자의 혼령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주술로써 가둬놓는 비방으로 들었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돌아가신 거로 봐얄 거예요.”

송학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침통해진 그의 두 눈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이곳으로 저격수들이 밀어닥칠 거예요. 한 번 실패하면 바로 그 윗 단계의 닌자가 침입해요, 절 살려두었다간 삼합회가 일순간에 와해될 수가 있거든요.”

이번엔 박사주가 심각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자 일처리가 생각 밖으로 까다롭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것은 송곳 끝으로 정수리를 후빈 듯한 섬뜩한 불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