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가 됐을 때에야 박사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극이 그려진 쥘부채를 든 채 두루마기 차림으로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는 송학수와 기미꼬의 차림새도 간단했다.

“제가 낮참에 진법을 하나 펼쳐 뒀습니다. 여러분도 귀 따갑도록 들었을 팔진법(八陣法)입니다.”

모두들 놀란 눈빛이었다. 송학수가 더듬거렸다.

“내가 듣기로 팔진은, 천지(天地) · 풍운(風雲) · 용호(龍虎) · 조사(鳥蛇)라는데 그런 진법을 펼칠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구분하는 건 전하는 이의 잘못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일부러 팔진이라 한 거지 진은 본시 하납니다.”

“그럴리가요, 내가 읽었던 진수나 나관중의 [삼국지]에도 여덟이라 하였는데요. 박사주께서 그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정말 팔진이란 진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송원장님 말씀대로 진이 여덟이면 펼치기가 사납겠지요. 병진 하나를 여덟 개로 나누고 그것을 ‘천지’라 한다면 이것은 기와 군호를 말합니다. 또한 풍운이라 한다면 깃발이 날리는 것이며, 용호 조사라 하면 대오를 이르는 말입니다.”

박사주는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그 뒤에는 또 하나의 유리창 덧문이 있었다.

“눈밭에 꽂혀있는 삼각기가 보입니까?”

“그렇네요,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이것은 팔진으로 보아 풍운지세(風雲之勢)라 할 수 있습니다. 여덟 개의 병진이 각기 풍운으로 통일됐다고 보면 무난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세분화 될 수 있습니다.”

즉, 천문에 따라 날씨의 변화가 있다는 말이다. 청명한 날씨나 바람이 부는 건 모두 하늘에 의한다. 땅도 마찬가지다. 현재 적과 대진하고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정원에 펼친 것은 팔진법 중 용진(龍陣)입니다. 용은 무소부재 하지만 반드시 존재한다 믿으면 흥미로운 구경을 하시게 될 겁니다.”

덧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 끝이 사납다. 잔뜩 웅크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사주는 오른손에 든 쥘부채로 왼손 바닥을 두드리며 세 개의 흰 삼각기가 꽂힌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모든 상황은 1백8십도 달라져 버렸다. 무심코 뒤를 따르던 송학수와 기미꼬가 질겁하여 물러섰다. 그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눈 내리는 정원이 아니라 발목까지 빠져드는 모래 늪이었다. 어디서 부는 바람인지 저만큼 아래쪽에서 한 사내가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앞을 주시한 채 박사주가 물었다.

“기미꼬 씨는 저 사내가 누군지 아시죠?”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그녀는 질겁했다.

“히라다예요.”

“뭐하는 사람입니까?”

“자폭대(自爆隊)로 불리는 공이오구 팀의 리더인 저격수예요.”

“저격수?”

“팀 가운데 이탈자가 있거나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살인기곕니다.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건 없어요. 오로지 떨어진 명령을 수행할 따름이에요.”

“그럼 닌자(忍者)겠군요.”

기미꼬는 답변했지만 놀란 표정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한눈에 닌자임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정원에 진법을 펼쳐 히라다를 통제할 정도라면 그 능력은 짐작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기미꼬는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나를 죽이려 왔을 거예요.”

“안심해요, 진법에 갇혔으니 설령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다 해도 빠져나가진 못해요.”

박사주는 그녀에게라기보다 두어 걸음 뒤에 서 있는 송학수를 의식하고 말을 던졌다. 진법은 [주역]의 후천수(後天數)인 낙서(洛書)의 배치에 따라 구성(九星)과 팔문(八門)이 펼쳐진 것으로, 원리는 구궁법(九宮法)이었다. 그는 낙서의 배치수에 따라 기를 꽂았었다.

감(坎)을 1로 하여 곤(坤)이 2, 진(震)이 3, 손(巽)이 4, 중앙(中央)이 5, 건(乾)이 6, 태(兌)가 7, 간(艮) 8, 이(離)가 9인 순서를 따랐다. 방법은 점법이나 같았다. 그러나 오죽헌 석실에서 걸음을 옮겼던 그 방법은 아니었다. 그것은 구궁진변을 파진하는 법이지 만드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꽂은 기는 다시 천간(天干)의 수 9를 뺀 뒤 나머지 수를 중궁에서 일으켜 9 · 8 · 7 · 6 · 5…처럼 역순으로 배치하는 게 2단계다. 여기에 다시 후천수(後天數)를 더해 9를 뺀 뒤에 남은 수를 이번에는 중궁에서 1 · 2 · 3…의 순서로 3단계 배치한다.

최종적인 마무리 과정은 중앙을 제외한 팔문의 배치다. 즉, 생문(生門) · 상문(傷門) · 사문(死門) · 경문(驚門) · 개문(開門) · 휴문(休門)은 계절에 따라 그 위치가 변화를 갖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그 옛날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펼쳤다는 변화무쌍한 팔진도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한 팔문에 구성을 배치하는데, 길흉과 상극을 적절히 안배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어디 그뿐인가?

탐랑 · 좌보 · 녹존 · 문곡 · 염정 · 거문 · 파군 · 무곡 등의 팔성(八星)과 천봉 · 천예 · 천충 · 천보 · 천금 · 천심 · 천주 · 천임 · 천영의 구성을 안배시키고, 직부 · 등사 · 태음 · 육합 · 구진 · 태상 · 주작 · 구지 · 구천 등의 구신(九神)을 섞어 천변만화의 변화를 일으키지만 박사주는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다.

그는 팔문의 배치로서 형성된 진으로 침입자를 가두는 경지에만 이른 것이다. 이 법술도 송학수나 기미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혼겁할 노릇이었음이 분명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오죽헌 밀실에 들어갔을 때 윤사달 어른은 이 진법의 오묘함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신당동에 있는 진역관(眞易館)에도 똑같은 진법이 펼쳐져 있습니다.”

송학수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을 거듭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네. 어떻게 삼각기를 꽂는 것으로 이런 변화를 일으킨단 말인가.”

“별말씀 다하십니다. 오죽 선생님의 사숙(師叔) 되시는 분은 육임(六壬)과 태을신수(太乙神數)에 능해 구궁변진(九宮變陣)이라는 걸 어린애가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지우는 것처럼 곳곳에 펼쳤다 거둬들였답니다. 보름달 같은 그분에 비한다면 나의 재주는 반딧불 같다고나 할까요.”

송학수는 정원에 펼쳐진 진법이 도둑을 예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에 흘러가는 것은 경북 안동에서 보았던 이씨 성 쓰는 선비의 집이었다. 이른바 임청각(臨淸閣)이다.

그 집은 동서에 문을 달았지만 남쪽만은 문을 내지 않고 낮은 담을 만들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곳으로 도둑이 침입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시 임청각의 배치를 유심히 살피던 도승은 지세상 어쩔 수 없이 낮은 담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작은 문을 내면 도둑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문을 달았는데 한 번은 이곳으로 도둑이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 붙들렸다. 그래서 문을 퇴도문(退盜門)이라 했다. 담밖에 기를 꽂고 그곳에 문을 냄으로써 진을 발동시켜 도둑의 출입을 막은 것이다.

“들어가십시다. 두어 시각 지나면 스스로를 묶고 살려달라 애원할 겁니다. 우린 들어가 기미꼬 씨의 얘기나 들어봅시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박사주는 뒤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성큼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겨 떼었다.

기미꼬는 그 말부터 꺼내 들었다. 자신과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후, 부친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제가 조부님에게 듣기론 제 아버님은 풍수사였답니다. 조선이 해방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에서 녹을 먹었나 봐요. 그때가 1945년 5월 무렵이라 했어요. 총독부에 근무하는 구로다 사무관이 조선 사람으로부터 수탈한 금괴를 운송하는 책임자가 되어 은밀히 목포항으로 떠났는데 중도에 습격을 받았답니다.”

기미꼬의 낯빛이 더욱 애잔했다.

“습격이라 했지만, 실은 구로다가 꾸민 자작극이었답니다.”

송학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작극?”

“예에, 그건 자작극이었대요. 구로다는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자신의 수하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여 단 세사람만이 목숨을 구한 것처럼 꾸민 거죠. 그는 총상을 입은 것처럼 꾸미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유유히 본국으로 떠났어요. 물론 그곳은 목포가 아닌 부산에서요.”

송학수는 흘끔 박사주를 바라보고 나서 기미꼬 쪽으로 시선을 붙박았다.

“서울로 돌아온 세 사람은 구로다와 전기응, 그리고 저의 부친 김창원 씨였답니다. 조부님 말에 따르면 당시 아버님은 총독부 문서과에 근무하는 강유선이라는 여인과 사랑하는 사이였답니다. 두 분이 만난 기간이 짧아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못챘지만요. 해방이 되어 잠시 몸을 피했다가 돌아오마던 부친은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자포자기 생활을 했었답니다.”

기미꼬는 잠시 얘기를 끊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흥건했다. 그녀는 몇번의 심호흡을 하고서야 가닥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