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 저녁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바람 끝도 포근하여 다음날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면서 햇살도 따사로웠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은 11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상균 씨가 반색했다.

“아따, 박사주구만잉. 박사주 말대로 내려 왔습디다. 그놈의 자슥이 우리 공칠이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니께 열불이 납디다만 으쩔것이어. 참는 수밖에. 그라나저라나 젊은 놈이 뭐할라고 귀신 단지를 찾는지 모르겄어라우.”

잠깐 메마른 입술에 침질을 하고 나서 상균 씨는 덧붙였다.

“창하산으로 떠난 지 한 20분 됐구만이라우잉. 생각 같아선 함께 올라가 뭔 일이라도 저질러 버리고 싶습디다만, 어제 대문간에서 넘어진 바람에 엉치뼈가 금갔지 뭐겄소. 엊저녁에 닭 한 마리 잡아서 묵으라고 했지라우. 미운 놈 고기 한점 더 준다는 말이 있잖습디까. 아, 그렇지라우. 해 지기 전 내려올 지 어쩔지 모르겠지만서두 따끈한 밥은 해 놔야 되겠지라우. 아, 예에. 옷가지는 놔두고 갔죠. 예에,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넣겠습니다.”

이즈음 서울에 있는 박일우는 싸늘한 얼굴이었다. 이동박에 대한 운수점을 쳤을 때 점사가 좋지 않았다.

창하산하(蒼霞山下)

감동초심(感動楚心)

‘창하산 아래 초나라 마음을 감동한다’는 뜻이다. 점괘는 아주 나쁘다. 지금은 원만히 생활하고 있으나, 장차 손해와 걱정이 많고 가족과 친구도 배반할 마음이 있는 괘였다. 박을기는 이것만으로 이동박의 운이 다된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이런 저런 일을 알고 있는 상균 씨가 섣불리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싶은 우려였다. 그런데 대문간에서 넘어져 기동이 불편하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서울은 일기가 고르지 않았지만 창하산은 햇살이 넉넉해 산을 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겨우 발목 정도나 빠질 만큼의 눈은 걸을 때마다 푹신한 느낌을 안겨 주어 산행이 편했다. 이동박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종교문제 연구소 문태일 소장 피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영화배우 송현국 씨를 지목하고 검거에 나섰습니다. 이 시간 현재 송현국 씨는 일절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송현국 씨의 수배 전단을 뿌리는 한편 충무로 일대의 여관과 유기장 등에 대해 일제히 검문 검색을 실시했습니다.>

이동박은 라디오를 끄며 코웃음을 날렸다. 만에 하나 송현국이가 진범으로 밝혀져도 뒷배경이 있는 한 염려 없었다. 군부의 실세와 줄이 닿아 있는 자신을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다 대감묘를 찾아낸 것은 산에 오른 지 2시간 반 만이었다. 둥그스름한 봉분 앞에 멈춰서 배낭을 벗어 던지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담배 한가치를 피워 물고 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니 생각대로 ｢추사정｣의 편액에 씌어진 내용이었다.

주도면밀하게 주위를 살폈다. 혹시 비석이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니고 편의적으로 옮겨 놓지 않았는가였다. 눈이 녹아 있는 곳곳을 훑었지만 비석이 꽂힐 만한 자리가 없었다. 이를테면 봉분을 올린 형태로 볼 때 비석은 당연히 앞쪽에 서야 정상이었다. 이동박은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부차십량진(不借十兩盡)

지공종사절(只恐宗祀絶)

사가잉불매(思家仍不寐)

중소일편월(中宵一片月)

비석 앞에 서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동으로 열 걸음을 걸었다. 그런 다음 나직이 ‘지공종사절’을 외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남쪽 방향으로 여덟 걸음을 옮겼다. 약간 미끄러웠지만 중심을 잡은 탓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중소일편월’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천의 도요지에서 북으로 한 걸음을 떼지 않고 일곱 걸음 반을 걸었다면 어찌 됐을까? 그는 잘게 웃어 가며 천천히 일곱 걸음 반을 걷고 멈추었다. 그 자리에 볼펜을 거꾸로 박고 배낭을 가져왔다. 기역자로 꺾이는 야전삽을 꺼내 주위의 눈과 흙을 가볍게 파 올렸다.

“그렇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야전삽 끝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홈처럼 패인 작은 골이었다. 그 골을 따라 긁어 내려가자 사방이 0.8미터 남짓인 사각형 오석이 덮개 구실을 하고 있는 게 드러났다. 골을 따라 주위를 긁어낸 후 오석을 위쪽으로 치켜올렸다.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잠시 옆으로 비켜서 배낭에서 후래시를 꺼내 안쪽을 비췄다. 날씨 탓인지 사물이 흐릿했다. 곁에 있는 눈을 뭉쳐 아래로 던져 보았다. 소리가 전달되는 느낌으로 보아 좋이 3미터는 돼 보였다.

배낭에서 꺼낸 로프를 해묵은 소나무 가지에 묶고 3십센티 남짓인 야전삽과 후래시만을 혁대에 꽂은 채 로프를 잡고 내려갔다. 입구가 호리병처럼 좁은 탓에 아무래도 오리털 파카는 벗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가자 무조건 안쪽으로 들어갔다. 급한 건 부장품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본다면 이곳은 관이 안치될 때의 입구가 아닌 게 분명했다.

흩어진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평면도를 가상해 보았다. 중앙에 관이 있다고 볼 때, 자신이 있는 곳은 원으로 둘러쳐진 어느 한곳이었다. 달팽이 속처럼 관이 있는 곳을 향해 빙글빙글 돌며 안쪽으로 들어가는 이치였다.

통로는 두 사람이 걷기에 충분할 정도로 짜여져 있었다. 손으로 밀쳐 보았지만 꿈쩍 하지 않았다. 후래시로 비춰가며 안으로 걸어가자 이윽고 끝이 나타났다. 그곳에 두 개의 관이 있었다. 그 관들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관 주위를 석회로 부어 놓았다.

부장품 주위엔 먼지가 수북했지만 거미줄 같은 것은 없었다. 1미터 어림의 고리짝 안엔 패물이며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가 입는 옷이 아니라 무당들이 입는 신복이었다. 굿에 필요한 여러 도구는 반대쪽 고리짝에 있었다.

그 안엔 요강이며 신전(神錢 ; 구멍 뚫린 엽전) · 은장도 · 비녀와 팔찌 등속이 들어 있었다. 이것저것 매만지던 손끝이 작은 함에 머물렀다. 크기나 정도로 보아 마호(魔壺)가 분명했다. 함을 열려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고리가 있는 부분을 붉은 천으로 막고 그곳에 먹물로 끼적여놓은 글귀가 있었다.

<차실개사(此室皆死)>

이 묘실에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뜻이다. 이동박은 질겁하여 일어섰다. 마호로 믿은 작은 함만을 품에 안은 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무언가 그의 발에 거치적거렸다. 반사적으로 후래시를 비쳤다. 햇살처럼 쏘아 간 후래시의 불빛에 드러난 것은 사내의 시체였다.

냉난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서인지 형태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잘해야 서른 안쪽으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잔뜩 공포에 질린 낯빛이었다. 그의 발치 어림엔 철 지난 기자수첩이 놓여 있었다. 첫 장을 여는 순간 이동박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는 ｢사건과 추적｣에 근무했던 남우섭(南又燮) 차장이었다.

그는 입구를 향해 달렸다. 어느 각도에서 햇살이 비쳐오는지 뚜껑이 열린 묘실 입구가 자세히 드러났다. 로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걸음 앞에는 뼈만 남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오래 전에 앉아 있는 자세로 죽은 소년의 발치에는 녹이 슨 후래시가 놓여 있었다.

실내가 어두워진 것은 그때였다. 이동박이 질겁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무당 최씨가 출입구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머리는 찬란한 은빛이었다.

“당신, 누구요?”

엉겁결에 한 손으로 햇빛을 차단하여 물었다. 그 순간 로프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서 로프를 내려!”

“이히히히히!”

음산한 웃음소리가 내리 깔리자 섬뜩한 불안감이 온몸을 적셨다. 이동박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배낭과 로프가 밑으로 떨어졌다.

“야, 이 새끼야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도대체 뭣하는 짓이야? 야 이 새끼야!”

이번에는 오리털 파카가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트랜지스타 라디오가 밖으로 튕겨 나오더니 칙칙 거리는 잡음 속에 뉴스 속보를 알렸다.

<종교문제연구소 문태일 소장의 피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송현국 씨를 검거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검거 당시 송현국 씨는 현금 1천만원을 소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로 보아 청부살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송현국 씨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 ｢스캔들｣ 잡지의 이동박 부장과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것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송현국 씨의 몸에서 상대를 저주하는 동목인(桐木人)이 발견됨으로써 이 사건은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송현국이가 소지한 현금 봉투에 찍힌 ｢스캔들｣ 잡지의 상홉니다. 이점에 주목하고 경찰은 이동박 부장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습니다.>

조금씩 엷어져가는 햇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실성한 최씨가 출입구를 오석으로 완전히 막아 버렸다.

“야, 이 새끼야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그 소리는 잠든 영혼을 깨우려는 듯 공동이 되어 음습하게 회돌이 쳤다. 이동박은 눈앞을 스치는 뿔 돋친 뱀의 환영(幻影)에 자지러지며 혼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