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장은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묵묵부답으로 정공칠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가 말했다.

“장회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정읍에선 이미 금동이 삼촌을 잊었어요. 먹고살기 힘들었던 때니 하룻밤 지나면서 모두들 잊어버렸어요. 제가 찾아온 건 해묵은 옛날 일을 들춰내 장회장님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그 점 믿어도 됩니다.”

“속죄하는 의미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일은 회장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자네가 어찌 아는가?”

“무당 최씨가 온 동네 소문을 냈어요.”

“최씨가?”

“예에, 그 사람 실성했거든요. 밤만 되면 뱀이 쫓아온다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어요. 가끔 맨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날 밤 일을 혼잣말로 들려줬었죠.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어요. 박수무당 최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출입구를 찾아야 했는데 그곳을 찾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뜬소리로 생각할밖에요.”

“최씨는 어찌 됐는가?”

“여전히 그 상태죠. 신기(神氣)가 달아나 버렸지만 그래도 한적한 곳에서 만나면 눈초리가 무서워요. 그 사람 창하산에 굴을 파고 혼자 산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허리는 구부러졌지만 기력은 예전보다 못하진 않나 봐요. 그러니 요지경이죠. 차암, 조금 전에 금동이 삼촌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물으셨죠.”

“생각해 둔 게 있는가?”

“다른 건 아니구요. 그 대감묘 말입니다. 너무 오래되어 봉분도 내려앉았지만 비석이 두 동강 난 채 굴러다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장회장님께서 비석이나 하나 마련해 주시죠. 지하에 묻힌 영혼도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함세. 달리 내게 할 얘긴 없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서삼릉 미스터리｣에 관한 기사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묻는 의도가 뭔가? 그 기살 사라는 건가?”

“아닙니다. 전 회장님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기사화 시켜도 회장님께 지장이 없는지 그걸 묻고 있습니다.”

“어느 만큼은 지장이 있겠지.”

“무슨 뜻입니까?”

“서삼릉을 조성할 때 내가 동참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역사의 단죄를 피할 수 없어.”

‘역사의 단죄?’

“그렇잖은가. 머지않아 염라대왕 면전에 나가야 할 이 장민호가 많은 문화재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는가. 그러잖아도 식자들은 나를 매국노 1호로 몰아부치더구만. 모든 것은 다 참고 견딜 수 있어도 그것만은 어렵더구만. 그게 힘들어, 하나뿐인 자식도 건수하지 못한 애빈데 무슨 할 말 있겠는가.”

정공칠은 이날에야 비로소 장민호의 진면목을 알아차렸다. 그가 수많은 땅을 사들인 것은 그곳이 일본인들에게 찢기고 토막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마음 문을 열자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것은 결국 잡지사 특집부장인 정공칠이 ｢한국부동산 컨설팅｣의 기획실장 겸 회장 부속실 실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정실장 그 사람 하는 일마다 매듭이 분명해. 알게 모르게 정이 들다 보니 그 사람이 잘못된 후엔 나도 매사에 의욕을 잃었네. 그러나저러나 ｢추사정｣ 가까이 문화재가 있다는 걸 어찌 알았소?”

박일우가 빙그레 웃었다. 사실은 그 역시 짐작뿐이었다. 그런데 차석만이 들려준 ‘부지사중(不只思中)’이란 말을 듣고 혈자리를 찾아가는 침술사처럼 노련하게 맥점을 찌른 것이다.

“어쨌든 나와 내 딸의 명예를 지켜 주어 고맙소. 내 박사주의 신세는 잊지 않을 것이오.”

“지금 군부 쪽은 어떻습니까?”

“말들이 많아요. 이 사람 저 사람이 하루걸러 전화를 해 옵니다. 적당히 헌납하는 게 매부 좋고 누이 좋은 결과라지 뭐겠소. 그래서 내 그랬어요. 내놓고 싶어도 내줄 것이 없다고. 가진 것이라곤 달랑 이 집뿐인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건지 알 수 없다 했소. 하긴 그럴 것이오. 그 많은 재산 놔두고 엄살 부린다 하지 않겠소? 허허허, 하긴 엄살일 수도 있겠구만. 안 그렇소 박사주!”

장회장은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 바람에 구미 당기는 안주를 콕콕 찍어 대던 정상필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