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날세.”

목소리가 영락없이 사내였다. 구로다는 혼비백산했다. 엉거주춤 일어나 뒷걸음치는 자세를 취하자 도화녀가 다가갔다.

“나를 만나는 게 싫은가 보이. 자, 우리 술이나 한잔 하며 지난 일은 잊어버리세. 어서 오게 친구, 내게 술 한 잔 따라 주어.”

구로다는 공포심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그러자 도화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귀기가 너울거리는 호통이 터져나왔다.

“네 이놈! 네가 내 누이를 겁간하여 죽인 것도 원통한 일이거늘 이젠 나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네놈이 온전할 성 싶으냐. 사지를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바위를 쪼개 칼을 만들어 네 육신을 토막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라!”

“그만, 그만!”

구로다는 공포에 질려 고함쳤다. 그러나 도화녀의 질책은 채찍 끝처럼 매서웠다.

“이놈, 이리 오너라. 내 너를 친구로 여겨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나를 파멸시키고 그것도 부족해 나를 죽였느냐. 인두껍을 쓰고 악행을 밥먹듯 했으니 네놈이 온전할 성싶으냐! 자, 이리 오너라. 나와 음부의 바늘 지옥으로 가자!”

도화녀가 두어 걸음인가 내딛었을 때였다. 총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식은땀을 흘리던 구로다는 기어코 권총을 꺼내 도화녀를 향해 난사한 것이다.

한차례 바람이 거칠게 몰아쳐갔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대나무 숲에 걸린 눈송이가 곱게 빻은 떡가루처럼 흩날렸다. 윤사달은 한동안의 침묵을 깨뜨리며 다시 걸었다. 열두 간으로 된 오죽헌으로 돌아와 벽암이 거처했던 방으로 들어서자 얘기가 계속되었다.

“나중에야 벽암이 내 사위가 된 것을 알았지만, 그를 통해 내 한을 지울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네. 그래서 관매점(觀梅占)으로 비방을 만들어 자네가 찾아오길 기다렸지. 인연이란 하늘이 만든 것이고.”

“어르신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동안 황극경세원의 송원장께선 허련 스승님의 생사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왔습니다. 파자점으로써 생존해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아직껏 만나 뵙지 못했답니다.”

“변변치 못한 사람 같으니.”

“예에?”

“내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딱딱선생의 점법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은데도 며느리의 위장술에 속지 않았는가. 어허, 있는 그대로를 헤아린다면 고작 천기점에 불과하다니까. 잔뜩 구름이 끼고 천둥이 울면 어느 누구라도 비 온다고 예측을 못할까. 에잉, 그러고도 어찌 육관도사인가!”

“….”

“그 일은 차차 알게 될 터니 신경 쓰지 말게. 내가 자네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지난 얘기를 들려주려는 한가한 소치가 아니야. 그 동안 내가 죽은 것으로 믿은 구로다가 나타났으니 묵은 은원을 정리해야 될 게 아닌가. 우선 그것부터 자네가 맡아 주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가만, 묵은 얘길 한가지 더 해야겠네. 지난날 신력이 떨어진 내 아내를 돕기 위해 금옥이라는 무당이 데려온 계집아이가 어찌 됐는지 아는가. 그 아인 굶겨 죽였네.”

“예에?”

“태자귀(太子鬼)라는 것이지. 아이가 죽었을 때 죽은 혼이 무당에게 달라붙는다면 이해가 빠를 게야. 태자귀는 요사스러운 말을 곧잘 하지. 때론 문복자(問卜者 ; 길흉을 묻기 위해 온 사람)를 곤란하게 만드는 장난도 치지만 신점을 치는 무당들은 진(晉)나라의 태자 신생(申生)의 원귀를 불러내 점사를 얻네. 어찌나 성질이 고약한 지 자주 찾지 않으면 삐지기를 잘해 아무 곳이나 떠나 버리거든. 그래서 영험한 무당일수록 태자귀를 잘 구슬리네.”

“아, 예에.”

“인위적으로 태자귀를 만들 수도 있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곳은 한이 깊은 고장이야. 전라도 땅이 그렇다고나 할까. 남도 지방에 무당이 많은 것은 태자귀의 힘으로 재물을 쉽게 모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 그러다 보니 신통력이 떨어진 무당은 다른 무당의 태자귀를 훔쳐오는 진풍경도 벌어지네.”

겨울 날씨는 한가롭게 예측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눈발이 거칠어졌다. 바람은 불지 않는데도 하늘을 뒤덮을 듯 눈발이 쏟아져 내렸다. 잠시 창 쪽을 노려보던 윤사달은 무심하게 얘기를 덧붙였다.

“구로다(黑田)의 방한은 깊은 뜻이 있네. 한일간의 경제 교역을 논하고 친밀한 유대 관계를 통해 20세기를 선도하자는 것은 입에 발린 소리지. 그 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그러다 보니 무당의 피를 받았던 그의 영혼은 더욱 황폐해진 거지. 사악한 그 자로 인해 한일 관계가 더 위태로워질 수도 있고, 일본을 더욱 국수주의로 몰아갈 위험이 있네.

이참에 그 자가 방한한 목적도 이 나라에서 일어난 소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는 복선이 깔려 있어. 그 자의 사악한 영기(靈氣)는 자네만이 간신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네. 그곳에 갈 때엔 결코 와룡패를 몸에서 떼어내선 아니되네. 미루어 생각건대 그 자는 분명 신도원의 특별한 장소에서 명도(明圖)를 부를 것이네. 무당들이 불러내는 태자귀로선 상대할 수 없는 사악한 위인일세.”

윤사달은 사전에 준비해 두었던지 책장에 꽂힌 [마의상법]이란 책속에서 낡은 신문 조각을 꺼냈다. 그것은 1931년 12월에 있었던 제2의 대본교(大本敎) 사기사건에 관한 기사였다.

<동경제대 의학부 교수 미야게(三宅鑛一) 박사의 감정에 의하면 조선인 의학박사 안일태는 과대망상증 정신 질환 환자이며, 함께 기소된 조선인 판수 무당 고대업 역시 우울증 정신병자이다. 안일태는 박사 학위를 소지한 훌륭한 의학박사인 데도 명도(明圖)에 관해 과학적으로 뒷설명이 가능한 것처럼 증언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명도의 힘을 빌어 멀리 떨어진 친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눈을 감고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원하는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힘을 초월한 희대의 영술(靈術)이라 속여 우매한 선남선녀들을 끌어들여 사기 행각을 일삼았다.>

그 뒤로는 동경 재판소의 기소 이유와 재판 과정이 실려 있었다. 즉, ‘영의 소리’라는 것은 고대업이라는 판수 무당이 입술을 오므려 귀신 흉내를 냈다는 것이다. 판결은 유죄가 아니라 ‘우울성 정신질환자’로 면소되었다.

“고대업으로서는 최악이었던 셈이지. 자네도 생각해 보게, 저명한 의학박사가 일개 판수 무당의 명도점을 극구 칭찬하고 나섰다면 어찌 되겠는가. 동경 재판소가 고대업의 신통력을 인정해 준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지.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일본 무당 구로다 가문의 입김이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게. 고대업은 사기꾼이 아니라 신통력을 행사한 영술의 일인자였네.”

“어르신, 제가 신도원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시오.”

“그건 말로 해선 소용 없네. 오히려 자네에게 해로울 수도 있구.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네만 오늘밤은 이곳에 머물지 말고 곧장 떠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