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난 세월의 먼지를 털어 낼 때도 되었어. 그러기 위해 내가 온 거지만.”

윤사달은 감회가 깊은 표정으로 뒷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 일이구만. 30년도 훨씬 넘은….”

그때 이곳 진역관은 선녀보살 도화녀(桃花女)의 점집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남편 윤사달이 국사당 모임 이후 몇 번인가 집안을 들락거리다 실종되자 선녀보살 도화녀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남편의 생사를 알기 위해 몇 번인가 쌀을 뿌려 보았지만 길흉이 반반으로 떨어지자 맥이 풀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흔이 넘은 여인이 그녀를 찾아왔다.

“나는 일본 놈들이 폐관시키기 전까지 국사당의 일을 보던 금옥(琴玉)이라는 무당입니다. 간밤 꿈에 몸주께서 나타나시어 이곳으로 제 발걸음을 돌린 탓에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루요?”

금옥이라는 여인은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뿌리며 속삭였다.

“요즘 선녀 보살께선 신통력이 떨어졌지요?”

“그게 어떻단 말인가요.”

“제가 그 신통력을 되돌려 놓겠어요. 그 대신 내 아들을 맡아 주세요.”

“아들?”

“국사당 가까이의 친척집에 잠시 의탁시켰답니다. 남편이 없는 몸이니 마땅히 거처를 정할 곳도 없구요. 그래서….”

“처지는 그렇다 하나 나 역시 남정네 없는 집에 딸아이만 하나 있습니다. 과년한 딸아이가 있는 집에 남자가 들어온다는 것이….”

여인이 말갛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런 걱정 아니 해도 됩니다. 내 아들은 제 몸도 겨우 추스를 정도니까요. 세상에 태어날 때는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더니 나이 스물이 넘으면서 앉은뱅이가 됐지 뭡니까. 집안 대대로 한약방(漢藥房)이 가업이다 보니 그런 대로 탕약을 써 왔습니다만,  저에게 신기가 내리고부터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답니다. 무당 딸을 둔 한약방에 어느 누가 진맥하러 오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딱했다. 그러나 도화녀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이 집을 비운지 여러 해 됐습니다만, 생사를 모르니 답답할 밖에요. 점치는 내가 생사를 짚어낼 수 없는데 무슨 신통력이 있어 다른 사람 운술 봐주겠어요. 아무래도 신기(神旗)를 내려야 할 것 같아요.”

금옥이라는 여인이 정색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 집은 신력(神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깥양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지만, 그 분이 깊이 사려하여 만드신 것이니 소홀히 다루어선 아니 될 것 같습니다.”

“….”

“내게 쌀 세 가마니 값만 주시면 비방을 가져오겠습니다.”

도화녀는 마지못해 쌀 세 가마니 값을 내주었다. 비방을 가져오겠다고 떠난 금옥이라는 여인은 닷새 후에야 돌아왔다. 여인의 뒤엔 다섯 살 남짓으로 뵈는 계집아이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여인은 그날부터 대나무 숲에 큰항아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고 그 위로 차일을 쳤다. 오색실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하루 한 차례 삼주령(三呪鈴 ; 방울이 셋 달린 팔찌)을 울리며 공을 들였다. 이레가 지나갔다.

“마님, 신력이 차고 넘치면 능히 천신으로부터 공창(空唱)을 받게 됩니다. 때가 되었으니 접신(接神 ; 몸주로 받아들임)할 준비를 하십시오.”

다시 하루가 지나자 푸닥거리가 시작되었다. 어느 누가 그것을 구경이라도 했을 양이면 희한한 정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판이었다. 선녀보살 도화녀가 자신의 신력을 돋우기 위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한다는 게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러나 신경과민에 빠져 있던 도화녀에게 그런 일쯤은 이미 옳고 그름을 떠난 무감각한 상태였다.

달빛이 흐린 깊은 밤. 신복을 입은 금옥이가 울리는 바라 소리가 대나무 숲을 흔들었다. 그에 따라 뚜껑을 열어 젖힌 항아리 주위를 맴돌며 도화녀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일종의 ‘불깃’이었다. 이것은 큰무당이 자신의 능력을 작은 무당에게 이양하는 작업에 해당됐다.

두어 시간쯤 되었을까? 항아리 주위를 맴돌던 도화녀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넘어져 버렸다. 그 후 도화녀에 대한 명성이 장안을 휩쓴 것은 그렇게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도화신녀’라 높이 부르게 된 것도 영험한 신점(神占)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조선 총독부 정보과 사무관 구로다(黑田)였다. 동료 선후배들과 찾아와 날카로운 눈길로 집안을 탐색하더니 주위를 물리고 딴전을 피워 댔다.

“당신의 신점이 영험하다는 걸 어찌 믿겠소?”

“그거야 시험해 보면 알 일입니다. 만약 영검이 없다면 어떤 처벌도 받겠습니다.”

구로다의 눈가에 찬웃음이 번졌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도 불러낼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두 분의 친분이 평소에 돈독했다면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불러내 봐. 음, 누군고 하면…, 나와 정보과에 근무했던 와다나베 게이이찌(渡邊光一)가 있었지. 석 달 전에 죽었던가. 그의 영혼이 좋겠어. 그 자를 불러 보게.”

“친구분의 영혼을 불러내려면 안주 몇 접시와 술 한병, 그리고 선생께서 입으셨던 평상시의 옷 한 벌이 필요합니다. 물론 친구분의 영혼을 불러내는 것은 한밤중이라야 합니다.”

“아무래도 좋소. 불러만 내시오!”

구로다는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준비시켰다. 마당 한가운데 자리를 만들고 술상을 차렸다. 구로다의 옷을 입은 도화녀는 한동안 하늘을 향해 삼주령을 흔들며 주문을 외우더니 무언가 하늘로부터 받아들이는 몸짓을 취했다. 그러다가 구로다를 향해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살아 있는 친구를 대하는 정겨운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