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기다리시오, 박사주. 조금 있으면 문태일 소장이 올 거요. 급히 할 얘기가 있다 했으니 들어봅시다.”

하필이면 호텔에 숙소를 정했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한 심중을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지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티브이 전원을 올렸다. 화면은 금방 살아 돋았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은 예고해 드린 대로 일본 경제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구로다(黑田一鴨) 회장의 방한 일정과 그 동안 한국에 진출한 자기업(子企業)에 대한 자산 재평가 등의 문제를 진솔하게 밝힐 예정이었습니다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관계로 대담 프로를 취소했습니다.
에, 이 시간에는 구로다 회장의 방한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몇 가지 측면에서 점검해 볼까 합니다. 구로다 회장은 정읍에 소재한 요양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건강이 조속히 회복되길 바랍니다.”

“구로다가 한국에 자기업을 두었어?”

송학수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김순원의 답변이 조심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도 몇 군뎁니다. 제가 밀착 취재했던 ｢세계 평화 교수회(世界平和敎授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5년 전에 세워진 연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모든 비용은 방주교회(方舟敎會)에서 전액 출자했거든요.”

방주교회는 여당의 전국구 의원인 김삼렬(金三烈) 씨가 몸담은 교단이었다. 그 교회 장로로 알려진 김삼렬 의원의 각별한 요청에 의해 15년 전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설립됐었다. 그 동안 이 단체의 후원금을 받은 석학들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만나는 그들에게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선 방주파(方舟派)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제가 취재해 온 건 자연 식품 쪽입니다. 이 분야만큼은 우리 기업이 독보적으로 이끌어 온 것 같습니다만, 내용 면에서는 일본 쪽에 끌려가고 있어요. 이를테면 자연 식품을 제3의 방법으로 탈바꿈시킨 제품들은 한결같이 고가품이거든요. 똑같은 물건을 열 개 팔았다고 볼 때 가격 차이는 30배 이상 납니다. 경쟁력에서 떨어진다는 거죠. 이들은 적당히 포장해 이윤을 남기는 우리완 달리 모든 면에 앞서 가고 있어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분야가 크게 잠식당할 것은 정한 이치죠.”

건강 보조 식품 한 가지에 국한된 예라 했다. 이들은 문어발식 조직력으로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이 네 사람, 네 사람이 여덟 사람을 끌여들이는 특이한 판매 전략을 세우고 있음도 지적했다.

“그것을 피라미드식 판매 방법이라 합니다.”

박일우가 물었다.

“성생활 보조 기구의 판매는 어떤가?”

“마찬가집니다. 그 동안 우리 기업들도 그 방면에 진출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우리 생활 방식으로 볼 때 그것을 드러내 놓고 판매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어요. 그러다 보니 그 방면에 해당되는 물건이 아무리 일본을 비롯한 외국 것을 능가해도 결국은 청계천이나 남대문 시장을 통해 음성적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는 애로점이 있습니다.”

김순원은 머뭇거리지 않고 덧붙였다.

“성기구는 일본의 시미즈 그룹에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성의 상품화가 세계적인 추세다 보니 우리 쪽에서도 그런 기구를 수입하는 업체가 생겼었죠. 여러분도 ‘주식회사 미로’라는 상호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문치수란 분이 사장이었는데 사업에는 실패했죠. 그러나 자살 동기가 상당히 애매하거든요.”

박일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떤 면이 애매하다는 거요?”

“사업을 실패한 사업가의 자살로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요. 상당량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실패하자 그 부동산을 부인에게 위자료로 내놓고 자살했습니다. 부동산이 어느 정도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저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었지만, 밀착 취재를 통해 그 양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재기하기에 충분한 부동산이었는데 자살을 택했다면 납득할 수 있겠어요? 그 사건도 내 취재 노트엔 미제 사건으로 남았습니다만.”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문태일 소장이었다. 바람 끝이 매서운지 귀부리가 벌겋게 달아 있었다. 따뜻한 물로 언 몸을 녹이고 나서야 어설픈 표정을 바로잡았다.

“박사주가 오후에 신도원에 간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송원장하고 저번에 나눈 얘깁니다만, 그곳에 가면 본당의 반대쪽 공사장을 주목해 달라는 겁니다.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한눈에 알 것입니다만, 본래 4, 5십기의 무덤이 있던 장소인데 그곳에서 ‘케이 투(K-2)’라는 약물(藥物)을 조제한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 은밀히 조사해주세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더불어 탁원제 기자와 김순옥 양의 행방도 수소문해 보시구요.”

송학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곳으로 오기 전 벽암에게 오죽 선생이 살아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네.”

박일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벽암이 그리 말했으니 틀림없을 게요. 그 동안 어디 계셨는가를 물었더니 바로 눈앞이라 했다네. 자네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좌판을 벌인 노인을 보았는가? 가만, 그러고 보니 박사주와 김기잔 구면이겠구만.”

박일우는 무슨 생각에선지 방법을 바꾸었다.

“김기자, 먼저 떠나는 게 좋겠소. 내 금방 뒤따라가리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내가 못 가더라도 누군가 김기자 옆에 있을 것이오. 자, 이걸 가지고 가시오.”

박일우가 건넨 것은 승천하듯 치달아 오르는 용이 찍힌 손바닥만한 그림이었다. 먹물을 입혀 찍은 와룡패의 부도(符圖)는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자기 쪽 사람과 접선할 때 쓰는 일종의 신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