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작품이 나온 것은 3주일 후였다. 제목은 [살의중독증(殺意中毒症)]이었다. 이것은 대룡출판사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자비 출판 형식으로 들어온 것으로 내용은 일본의 추리작가가 쓴 것을 번안(飜案)한 작품이었다.

이날 연락을 받고 나타난 박일우는 이스턴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김순원을 불렀다.

“그곳에서 나온 첫 작품 읽어 보았소?”

“대충은요. 내용이 좀 특이하더라구요. 번안 작품이지만 우리 정서엔 맞질 않아요.”

“뭐가요?”

“보셨는지 모르지만 그 소설 스토리란 게 그래요. 국민학교 2,3학년 수준인 소년이 바람난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벌이는 얘기잖습니까. 자기 어머니와 바람 피우는 남자의 아들을 불러내 위험한 놀이를 벌이잖아요. 육교 아래 서 있게 하여 어느 지점을 택시가 통과하면 쏜살같이 길을 가로질러가게 하죠. 아무런 사고 없이 통과하면 일을 주도한 소년으로부터 선물을 받잖아요. 나중에는 그 어머니가 이 일을 알게 되지만요.”

“누가 번안했는지는 모르구요?”

“글쎄요, 거기까진….”

“다른 건 없습니까?”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동료들 얘기론 박상무가 육원각이라는 요정에 출입한다더군요. [살의중독증] 원고도 거기서 온 거랍니다. 거기서 일본 노래도 배우고 한두 마디 지껄이는 일어도 그곳과 무관하지 않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마충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혹시 김기자에게 원고 하나 넘기지 않았소?”

“그랬어요. 대학노트에 쓴 것인데 제목은 [살검, 활검]이란 무협소설입니다.”

“무협소설이라….”

“노트를 받을 때만해도 별 시답잖은 걸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예요. 요즘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기획물 광고를 봤더니 정치를 풍자한 소설이 있더라구요. 그런 쪽에서 본다면 [살검, 활검]은 상품성이 있다고 봐야겠죠. 1부가 없는 2부지만요.”

김순원은 내용 설명으로 넘어갔다. 천하 명문가인 어느 집안이 하루 저녁에 참화를 입는다. 집안이 멸족되는데, 마침 천산에서 내려온 신험한 법사(法師)에게 아이의 운수를 물어보러 갔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유모의 손에서 자란 아이는 골격이 좋아 무예를 익히는데 그것은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가지 검법이었다. 하나는 살검(殺劍)이고 다른 하나는 활검(活劍)이었다.

“살검이란 칼이 검집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목이 달아나는 일도양단의 검법이고, 활검은 아무리 상대를 죽이려고 검을 휘둘러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급소를 피하기 때문에 잘 해야 상처만 입힐 수 있는 검법이에요. 구성이 재밌잖아요. 선과 악의 검법을 한사람이 익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궁금하구요.”

잠그지 않은 출입구 쪽에서 송학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김순원이를 향해 반색했다. 송학수는 방바닥에 놓인 [살의중독증]이라는 소설을 흘낏거리고 나서 목에 감은 머플러를 떼어냈다.

“그래, 박사주 보기엔 어떻소. 역시 우려했던 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장민호 회장 껀으로 한방 맞은 마충길이가 이번엔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젠 뫼시는 어른도 보이질 않는지 단독으로 나섰어요.”

김순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얘긴데요?”

“신년 운수가 산풍고(山風蠱)로 떨어질 때부터 조짐이 안좋아요. 기어코 양쪽에서 일을 저지를 모양입니다. 김기자, 한 번 더 나서주어야겠소.”

“뭐를요?”

“김기자가 동대문에 간 이유부터 설명하리다. 김기자는 ｢협상의 비결｣이 어떤 건지 생각해 보았소? 어떤 일을 협상할 때 최선의 협상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거요?
여기엔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중국공산당의 주석을 지낸 모택동(毛澤東)식인데, 방법은 어떤 일에나 결코 손해를 보지 않고 협상하는 것이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좀 양보하고 일을 성취하는 쪽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의 방법을 취해요. 그렇죠?”

“아, 예에.”

“결론적으로 모택동식 협상은 모든 일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협상이죠. 그러다보니 타협은 없어요.”

“그렇겠군요.”

“모택동이 공산당 혁명을 일으킬 때 써먹었던 무기 가운데 ｢무협소설｣이란 게 있어요. 사회가 혼탁해지면 불순한 세력이 날뛰는 건 당연하죠. 그들을 선(善)으로 교화시키는 건 시간 낭비라는 논리죠. 쓸데없이 시간 낭비 말고 악한 자들은 구뎅이를 파고 빗자루질 해버리는 게 그의 방식이에요.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십, 아니 수백 수천 명의 살인까지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거죠.”

“?….”

“청소년들이 세계명작으로 읽는 [죄와 벌]의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번민하는 것은 브르조아적인 발상이란 거죠. ‘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가능하다는 게 ｢무협소설｣의 논립니다. 그래서 성장기 청소년들에겐 무협소설을 못 읽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요즘은 신문 · 잡지에 무협소설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잖아요. 만화대본소에 가면 8활이 넘는 내용이 무협 만화예요 찌르고 베고 비명 지르고 부수고 피가 흐르고 난폭하게 날뛰며 절취하고 강간하고, 이건 무얼 말하느냐? 폭력이나 섹스 부분의 심의가 느슨해졌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