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무 뒤를 따라 들어가던 김순원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걸음을 멈췄다. 뽀얀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깔린 실내에는 좌우로 스물다섯 명씩, 어림잡아 쉰 명은 너끈해 보이는 남녀가 원고지를 다듬는 중이었다. 중앙 통로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박상무 뒤를 따라 들어가는 데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박상무의 자리는 통로 맨 끝으로 해묵은 나무 책상은 그런 대로 품위가 있어 보였다. 박상무가 손뼉을 요란스럽게 치며 ‘주목!’을 외쳤다. 일순간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정지되었다.

“에, 반가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신년 벽두부터 우리 회사에 참신한 신인 작가 한 분이 입사했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환영해 주십시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김순원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김대룡입니다”

“에, 김대룡 씨는 글을 쓰기 위해 입산하셨다가 저와 각별한 친구의 하산 권유로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세상이 깜짝 놀랄 글을 쓰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함께 지내는 중에 상부상조하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에, 그리고 여러분의 간절한 염원에 힘입어 오늘부터 일비를 350원에서 훌쩍 뛰어 500원으로 올렸으니 원고 작업에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군데군데서 환호성이 터지며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박상무는 손을 펼쳐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왼쪽에 앉은 단발머리 처녀에게 지시했다.

“김양, 중국 음식점과 한식당에 연락해 전표 값이 올랐다고 말해 줘요. 그리구 전표 가불은 예전에 두 장씩만 해줬잖아. 오늘부터 석 장씩 해 줘. 방법은 예전대로 일주일에 한 번이야. 알았어요? 괜히 인정에 이끌려 전표 가불 해주고 나중에 시제 안 맞는다고 질질 짜지 말고.”

그러거나 말거나 단발머리의 표정엔 온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일비가 상승한 여파 때문이었다. 박상무는 자기의 앉은키보다 더 큰 등받이 의자 뒤쪽에 있는 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벽으로 착각하기 쉬운 그곳은 같은 색깔의 벽지를 발라 쉬이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섯 평은 됨직한 안쪽엔 그런 대로 응접실용 소파가 버티고 있었다.

“자 앉읍시다.”

그는 대학노트를 펼쳐 들었다.

“용한 의사는 척 보면 환자가 죽을 건지 살 건지를 안다지 않습니까. 박부장이 소갤 했으니 그런 대로 기본은 됐을 거구, 참, 나이는 몇이우?”

“이제 군대 갔다 왔으니.”

“아 그러면 내가 수상이오. 난 서른이오. 세상의 모진 풍파를 몸으로 부딪치다 보니 팍 삭아부렀소만 아직은 삭신이 팔팔하니 견딜만해요. 박부장이 소개했대서가 아니라 난 무척 정에 약해요. 일하다가 어려운 일 있으면 그때그때 말을 해요. 들어줄만 하면 들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공짜는 아닙니다.”

“아, 예에.”

“내가 김대룡 씨를 보자 한 것은 이 노트 때문이오. 내 나름대로 무협 소설 초안을 잡아 놨는데 당최 시간이 없어 완성을 못시켰어요. 그러니 이걸 위주로 물건 하나 만들어 봐요. 원고료는 최상으로 줄 거니까. 지금 구상해서 판을 짜고 어쩌고 하면 한두 달 후딱 지나갈 거 아니오. 그러니 이 대학노트에 있는 내용을 잘 추스려 한 번 멋지게 완성해 봐요.”

“아, 예에.”

“그리고 자리는 요. 오른쪽 ‘춘향이 조(組)’가 좋을 것 같으니 천선생과 수인사를 나누시고.”

“춘향이 조라뇨?”

“나가 보면 압니다. 오늘내일 사이로 급한 일이 있으니 못 만날 것 같고 수일 안에 자리 한 번 만들어 봅시다.”

김순원은 가볍게 고갤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는지 실내가 썰렁했다. 난로가에 앉아 있던 예순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는 색이 바랜 공갈 모자(예술가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스물 대여섯으로 보이는 남녀가 연탄 난로 위로 손을 펼친 채 열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연휴를 훌쩍 보내고 나니 금요일이 반공일 같구만그래. 오늘내일 사이에 무슨 일이 되겠소. 그냥 자리나 메우는 거지. 카도집(골목에서 커브를 이룬 첫집)으로 가서 뜨끈한 오뎅국물에 국수나 말아 보세.”

마흔쯤 되어 보이는 성깔 좋은 아주머니가 주인인 카도집은 함바집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어엿이 붙은 간판은 영암식당이었다. 노가다판을 뒹굴던 털털이 사내들은 주인아주머니를 영암댁으로 불러 주었다. 공갈 모자를 쓴 천선생 역시 아주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천선상님. 그리고 작가님들두요.”

천선생 뒤를 따라 가던 남녀가 머쓱한 낯으로 김순원이를 돌아보았다. 안쪽에 자리 잡은 천선생은 벽에 붙은 메뉴판을 노려보았다. 모르긴 해도 가장 맛있고 싼 게 나오지 않았는가였다. 그러다가 불쑥 자신부터 소개하고 나섰다.

“나는 천달수요. 여기서는 이름보단 천선생으로 통해요.”

그는 영암댁이 가져온 뜨끈한 엽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두 남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야간 대학에 다니는 김종호고 나이가 스물넷이던가? 그리고 우리 춘향이는 방년 스물셋으로 장래 방송극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미쓰김인데….”

그녀가 말했다.

“김영숙입니다.”

“저는 김순…아니, 김대룡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