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동대문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잔뜩 웅크린 채 이스턴호텔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열차 다방｣은 취객들이 방뇨하기 안성맞춤인 후미진 골목 안에 있었다. 짐작대로 생선 썩는 듯한 퀴퀴한 냄새가 코끝에 아릿거렸다. 다방에 들어서자 3십대 전반으로 보이는 한복 입은 여인이 즐겁게 맞아들였다. 그녀는 엽차 잔을 놓으며 의례적으로 물었다.

“손님 오세요?”

“말 좀 물읍시다 마담.”

“뭔데요?”

마담이 어설픈 미소를 흘리며 건너편에 앉았다.

“이 건물에 대룡출판사라고 있습니까.”

“박상무님 찾아오셨어요?”

“어떻게 아십니까.”

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난로 가까이 앉아 있는 약간 머리가 벗겨진 사내를 가리켰다.

“저 분이세요, 자리 옮겨 드릴 테니 저쪽으로 가세요.”

마담이 떠드는 서슬에 그 사내가 뜨거운 엽차 물을 홀짝이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가까이 다가온 낯선 사내를 탐색했다.

“누구시더라….”

“일좀 하러 왔습니다.”

“일? 어느 분 소개시더라?”

“박일우 부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아, 박부장! 그 후루꾸 지금 뭣합니까?”

“예에?”

“아이구 미안합니다, 일본말 써서.”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는 듯 필요 이상으로 제스처를 크게 잡았다.

“어야, 마담. 여기 쌍화차 두 잔 빨리 가져오소!”

반색하는 마담의 대답 소리를 음미하며 사내는 다시 한 번 금테 안경을 고쳐 썼다. 가죽 점퍼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뽑아 건넸다.

<대룡출판사 상무 박동선(구:노식)>

큼직한 출판사 명칭 아래 직위와 이름은 붓글씨 체로 씌어 있고, 괄호 안에는 옛날 이름이 고딕으로 박혀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 이름만을 금박으로 덧입혔다.

“내 이름은 박동선이오. 형씨는 어떻게 됩니까?”

“전 김대룡입니다.”

“허, 김대룡? 클 대에 용용 짭니까?”

“그런데요.”

“히야, 무지무지한 인연입니다. 어쩌면 우리 출판사 이름을 그대로 가져갔습니까.”

그는 마담이 가져온 쌍화차를 한동안 저어 대다 뒷말을 붙였다.

“사실 이름이라는 게 그래요. 나쁜 이름보다 좋은 이름을 가져야 재수가 좋더라구요. 기분도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전 한 달이나 두 달 꼴로 이름을 바꾸거든요.”

“?….”

“지난달까지 박노식이란 이름을 썼어요. 영화배우 박노식 씨말입니다. 그 사람 이름을 썼더니 괜히 ‘상하이 박’ 흉내 내다 술집에서 된통 깨졌죠. 이상하게 거래처를 가도 쌈질할 일만 생기더라니까요. 그래서 바꿨어요. 박동선으로. 거 왜 있잖습니까, 미국의 로비스트! 근데 이 친구 뭘 어떻게 했길레 들통났드라고요 그때가 76년이죠 아마. 그 일 터지자 박통이 죽을 맛이었을 거요. 달러를 물 쓰듯 하며 미국 정계를 매수하려다 뽀록났으니.

그 친구 한국 기관원이 맞기는 맞는 거유? 지금도 빵빵거리고 설쳐대는 줄 알았더니 이미 파장이더라구요. 그런 것도 모르고 박동선으로 이름을 갈았으니 재주가 옴 붙었어요. 내 성이 신씨라면 신성일이라고 했을 것이구만. 그랬으면 끝내주는건데 조상이 원망시러워잉.”

그는 쌍화차를 후루루 마시고 나서 식어빠진 엽찻물로 와그르르 입안을 헹구었다. 비로소 제정신으로 들어온 듯 그는 업무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그래, 글좀 써 보셨수?”

“특별히 쓴 건 없습니다만 문학을 좋아합니다.”

“그러시구만. 그 후루꾸 아니 박부장이 소개 했다면 기본은 됐을 것이구…, 무협 소설 좋아하시우?”

“그럼요.”

“누구걸 좋아 하시우?”

“한국 작가로는 김광주 씨를 좋아합니다만 중국 쪽은 제갈 청운과 와룡생 것을 가끔 봅니다.”

“아하, 그러시구만. 혹시 [살검, 활검]이란 소설은 보셨수? 무지하게 재밌는데.”

“누가 썼습니까?”

“내가 심혈을 기울여 썼죠.”

“예에?”

“믿지 않으시누만. 보기엔 이래두 글재준 있는 몸이오. 그 책 대본소에만 3천부 때려 치웠수다. 언제 재판 찍으면 한 질 줄 테니 봐보슈.”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선생은 이 계통에 들어오면 이름깨나 날리겠어요. 미목이 수려하신 데다 안광이 서늘한 게 작품에 혼이 들어갈 것 같애요. 자세한 건 일을 하면서 하나씩 배우기로 하고 올라 갑시다. 얼추 점심시간이 다 됐네요. 식사 시간을 이용해 인사합시다.”

박상무는 훌쩍 일어나 카운터로 가더니 빳빳한 천원권 지폐로 상화차 값을 지불했다. 좁은 통로를 걸어 3층으로 올라가 노리끼리하게 칠한 니스가 벗겨져 검은 때가 오른 문 앞에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뿌리더니 ‘들어갑시다’ 하고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