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정치부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마충길을 접대한 인물은 대도그룹, 아니죠. 이후 방계회사로 설립된 주식회사 무극의 자금당담 상무 김시우였답니다. 이 사람 이력이 재밌어요. 재일교포 2세인데 일본명이 쓰노다 기꾸오예요. 와세다 상대 출신에 머리 회전이 빠르죠. 졸업과 동시에 미우라 클럽에 특채됐거든요. 거기뿐만 아니더라구요. 우리측 동경 지사에서 보내 온 자료에 의하면 시미즈 그룹의 취채역을 맡은 전력도 있어요.”

기미꼬가 과일 접시를 가져와 다소곳이 내려놓고 물러가자 잠시 끊겼던 김순원의 말이 이어졌다.

“쓰노다 기꾸오, 아니 김시우와 마충길이 접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충동 안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겁니다. 취중에 오명계 터가 어떻다느니 떠들었다면 김시우가 못 들었을 리 없죠.”

“그렇다고 김시우가 제보했다고 보긴 어렵잖은가. 마충길을 도와주기 위해?”

“아닙니다 송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

“신문을 보셨을 것입니다만, 마충길 쪽에서 신도교 터를 헌납하라는 강요가 있었거든요. 그 터는 땅값이 만만찮은 곳이에요.”

“그럼, 김시우가 신도교와 관련 있단 말인가?”

“확실합니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을 겁니다. 저희가 신문에서 그 점을 다루지 않은 건 좀 더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서죠.”

“확실한 것?”

“뛰고 있는 선후배 기자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보니 답변을 못 드리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김순원은 펼쳐 놓은 그림의 지명을 짚어 가듯 일목요연하게 결론을 내렸다.

“마충길 쪽에서 신도원을 접수하려 드니까 편법을 사용한 걸까요. 특히 장충동 안가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나타내는 오명계 텁니다. 마씨 삼인방이 그 땅을 접수하면 여론이 비등해질 게 뻔합니다. ‘오명계 터’를 구입하게 된 의도가 어딨는가를 언론에서 때리면 일이 고약하게 될 게 뻔하잖아요. 애써 터를 닦은 신도원을 헌납 형식으로 빼앗기는 걸 막자면 마충길이 장충동에 구입한 안가를 세상에 알리는 게 제1감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전화를 받을 때 혼선이 된 ‘정력주’에 대한 상담 전화로 보아 김시우가 몸담은 주식회사 무극이 틀림없어요. 난 장난질에 놀아난 어릿광대구요.”

박일우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흥분해 있는 김순원의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주었다.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송학수의 말이 무심하게 떨어졌다.

“눈이 내리는구만. 많은 사람이 저 눈을 보겠지. 힘 있는 자, 그렇지 못한 자, 배고파 아우성치는 자, 술에 취한 자, 실연을 당한 자, 죽음을 앞둔 불치병자…, 모두들 저 눈을 보고 있을 거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눈을 보며 생각하겠지. …내 어렸을 적에 스승님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네.”

그것은 [세설(世說)]에 나오는 얘기였다. 사안(謝安)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어느 눈 내리는 날 조카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쳤다. 점점이 떨어지던 눈발이 더욱 커지자 사안은 경쾌하게 ‘날리는 흰눈 무엇과 같은가?’라고 읊었다. 그러자 조카딸은 ‘공중에서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라’ 하고 대답했다. 다시 조카딸이 읊었다. ‘그러나 저 눈은 바람에 날리는 버들 꽃만 같지 못해라’였다.

사안을 즐겁게 한 조카딸은 장성하여 유명한 학자 도온(道蘊)의 부인이 되었다. 평범하게 내리는 눈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 얘기를 들으니 김순원의 머릿속에 경경냉서(輕瓊冷絮)란 말이 떠올랐다. 중국 당(唐)나라 때의 소설 [설(雪)의 시(詩)]에 나오는 말로 경(瓊)은 옥, 서(絮)는 솜이다. 가벼운 옥같고 차가운 솜 같은 눈, 그런 눈이 창밖에 내리고 있었다.

성에로 뿌연 유리창을 호호 불며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눈 내리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온통 설인(雪人)들의 행렬이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타고 북극의 어디 쯤에 내던져진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버스가 한국일보 방향으로 미끄러지자 김순원은 비로소 점퍼 깃을 세운 채 눈을 감았다.

“오명계에 관한 기사가 어제 나갔으니 마충길이 뒤집어졌을 거요. 김시우는 덩달아 자신의 재간이 먹혀 들어갔다고 자축할 거구. 당분간은 신문사 출입을 삼가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잘해야 한 달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 동안 김기잔 취직을 해야 하는데….”

김순원은 장갑 안쪽에 끼어 넣은 작은 메모지를 뽑아 보며 실소를 깨물었다. 전화번호가 씌어진 옆으로 대룡출판사(大龍出版社)라는 상호가 있었다.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호텔 사잇길을 타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두 번째 꺾는 길에 ｢열차 다방｣이 있어요. 4층을 올린 붉은 벽돌집이죠. 청계천 복개 공사를 허술하게 한 탓에 건물을 지을 땐 지하에 다방을 들였는데 지금은 메워 버렸어요. 하수구 냄새가 올라와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1층이 다방인데 그곳에 가서 대룡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박상무를 찾으면 됩니다.”

“박상무, 이름이 뭔데요?”

“알아도 소용없어요.”

“예에?”

“명함이야 주겠지만 그건 가명이오 박상무 정도로 알고 있으면 무난해요. 하긴 김기자도 가명을 써야 할거요. 음, 대룡출판사니 김대룡이가 좋겠네요. 그 사람 만나면 옛날 ｢스캔들｣ 잡지에 있었던 박부장이 보내서 왔다 하면 일거릴 줄 거요.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말해선 안 됩니다. 나와의 연락도 1년 전에 한 것으로 하구요. 아시겠어요?”

“제가 할 일은요?”

“가면 있어요.”

“그래도 기본적인 건 알고 가야 당황스럽지 않죠.”

“특별히 들려줄 말이 없으니 그냥 가세요. 필요한 건 상황에 따라 연락을 취하지요.”

생각해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멀쩡한 직장 놓아두고 엄동 설한에 새로운 직장 구하러 간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헛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