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프로라고 할 수 없지만 이천의 도요지에서 발굴된 사연은 너무 뜻밖이었다. 노트에 쓰인 것은 문일봉(文一鳳)이라는 여배우의 실종과 관계 있었다.

문일봉이라면 사오십대 중년이면 ‘아, 그 배우’ 하고 탄성을 지를 만한 미모의 여배우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은 사생아였다. 그녀의 출생에 대해 어느 여성 잡지에선 이런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여배우 문일봉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녀는 고향을 모른다. 아니 고향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 세상에 떨궈 준 부모의 이름자도 모른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다.>

그녀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접근하면 할수록 새로 나올 기사가 없었다. 그런 여배우에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해야 허섭스레기 같은 기사라도 얻을 수 있다.

이상한 점은 많다. 성장이나 영화배우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일정한 격식에 짜여진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독신이라는 그녀의 사생활은 윤미라라는 딸이 있다고 밝혀지면서 뒤끓었다. 과연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당시 세간에 떠돌았던 스캔들처럼 여당의 중진 의원인 신기섭인가 야당 부총재인 김성진인가였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딸의 성이 윤씨(尹氏)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관매점으로 이름을 떨치던 김송자(金松子)라는 점쟁이가 어느 여성지에 그녀의 평생 운을 펼쳐 놓았다.

<장안은 지금 여배우 문일봉의 실종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장안에 떠도는 소문을 들으면서 문여사의 실종이 타의에 의한 것인지, 또는 작의적인지에 대해 점괘로서 풀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문일봉의 관상에 대한 부분을 건들었다. 그녀는 아주 희미하지만 양쪽 눈썹 사이에 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문일봉이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부처님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송자는 그같은 소문이 아주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다. 그녀가 내세운 문헌은 관상서 [신상전편정의(神相全篇正義)]였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어쩌면 이 드라마가 끝을 맺기 전에 그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눈썹 사이에 박힌 진주 같은 점 때문이다. 점(點 ; 점법에서는 黑子라고 표기함)은 자연으로 비유하면 땅에 흙더미가 생기고 산야에 나무가 생기는 이치다. 만약 땅의 토질이 좋으면 좋은 나무가 자라듯, 토양이 나쁘면 점 또한 흉하게 자리 잡는다.>

그런 점에서 문일봉 여사의 눈썹 사이의 점은 ‘부처님 점’이 아니라 흉한 것으로 풀이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은 몸에 일흔두 개의 점이 있었다. 이것은 상학적으로 좋은 토양 위에 많은 나무가 우거진 것과 같으니 점이 많은 것은 상서로운 징조로 풀이했다.

점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좋다. 아무래도 노출된 곳에 있으면 흉할 수밖에 없다. 특히 눈썹 사이의 점은 부귀를 얻을 수 있으나 부모 형제와 인연이 없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문일봉 여사는 ｢사라진 여인｣의 마지막 회분을 찍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당시 매스컴들이 떠들어대던 그녀의 소재는 한 점의 도자기와 함께 놓인 공책 속에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였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나만 혼자라고 믿고 있을 뿐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어느 때인가 나는 내 부모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를 이 세상에 버리고 간 분들이 누굴까 하고. 그러다가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살리기 위해 고아원에 넣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부친은 매국노로 손가락질을 받게 되면서 항상 위험에 처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매국노’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송학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도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좋은 인연을 얻어 내가 대학 생활을 했을 때 두 사람을 사귀었다. 지금은 여당의 중진인 신기섭 의원과 야당 부총재 김성진 의원이다. 두 사람 모두 활달하고 좋은 친구들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두 분은 나의 생부(生父)에게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세상에 매국노로 알려졌으니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닌다는 게 얼마나 조바심 쳤겠는가. 만약 다른 학생들이 알기라도 했다면 크게 봉변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분들은 세상이 보는 눈으로 나의 생부를 보지 않았다. 항상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내가 그 분의 딸인 것을 알았을 때엔 헌신적으로 나를 보호해 주었다. 내게 딸 미라가 생긴 것은 스물세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지방으로 여행을 하던 중 버스 사고를 당했다. 나를 구해 주신 분은 마음씨 고운 시골 농부였다. 윤씨 성을 쓰는 그 분은 나와 미라를 구하고 아내와 함께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그때부터 미라는 내 딸이 되어 성장했다. 우리 모녀가 보낸 아름다운 시간은 짧은데 그것마저도 하늘이 시기한 것인지 모른다. 미라의 신장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의 딸에게 한쪽 신장을 준 게 화근이었다. 심각하게 수술후유증이 밀어닥쳤다. 자신이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의사의 진맥에 그녀는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내놓았다. 그녀가 수술용으로 기증한 모든 기관(器管)은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였다. 송학수가 쓸쓸히 덧붙였다.

“물론 나중에야 장민호 회장도 알았을 터지만, 어떻게 그 자리에 문일봉 여사의 기록을 박사주가 묻게 됐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오. 나 역시 점법으로 일세를 풍미해 왔지만 지금껏 내 눈으로 보고 들은 이 일만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요.”

어디 그뿐인가. ｢스캔들｣ 잡지에 근무한다는 이동박이 날린 회심의 일타를, 홈런 직전에 아웃시킨 드라마틱한 배치(配置)는 아무리 생각해도 감탄을 거듭할밖에 없었다.

특별히 제작한 신년특집 프로, 그것은 ｢서삼릉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여배우 ｢문일봉의 미스터리｣였다. 이제까지 신기섭과 김성진과의 삼각관계에 휘말린 추악한 스토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실종은 자신의 몸을 던져 정작 이 사회의 등불로 남고자 하는 아름다운 헌신의 표본이었다.

프로는 끝났다. 그녀가 살아온 지난 길들을 잠시 뒷배경으로 깔고 지극히 전원적인 화면에 멘트가 떠올랐다.

―그대는 아름다운 한 절(節)의 시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