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무라야마 연구소의 대한(對韓) 실적에 대한 분석이었다. 마사끼는 신도원(神道院)에 대한 문제점을 꺼내 들었다.

“10.26 사태 이전에는 종교 활동이 자유로웠습니다만, 12.12 이후로는 우리 쪽에 큰 부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군부와의 이음새인 마충길 대령은 그곳을 헌납 형식으로 내놓는 게 우리 쪽에 상당한 이득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만.”

미우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대한 사업의 전초 기지를 삼은 곳이 바로 신도원이었잖소. 더구나 그곳은 삼합회의 흔적이 많아 우리 의도가 쉽게 노출될 수 있어요. 얼마 전에도 탁원제라는 월간지 기자가 침입해 [격암유록]과 [신도경]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려 든 것도 간과해선 안 될 일이구요.”

마사끼의 낯빛이 곤혹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충길 한 사람만을 겨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삼합회 전체를 그 자의 수중에서 저울질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내 생각엔 일이 확대되기 전 신도원을 저들에게 헌납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피해를 극소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삼합회 흔적은 없애야겠지만요.”

미우라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신년도엔 구로다 회장님이 방한할 예정이시니 그때 가서 결정해도 무난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미우라 클럽의 사업 지수는 처음 계획대로 120프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미우라가 과신한 것처럼 미우라 클럽의 사업 진도 지수는 120프로를 상회했다. 그 하나가 ‘미우라 우동’이었다. 이십여 가지의 종류로 세분한 우동은 약간씩 내용물을 바꾸어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우동 한 그릇에 1만2천원에서 3만원을 호가했다. 라면 한 그릇에 2백원 하던 것에 비한다면 우동 값은 천문학적이었다. 그런데도 ‘미우라 우동’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나는 한국 사람의 의식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긴 이 사업도 구로다 회장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니 그분의 사업적인 안목을 크게 쳐줄 수밖에 없지만.”

미우라는 느긋했다. 사업적인 면으로 본다면 마사오나 마사끼도 전연 꿀릴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한국의 심장부에 치명적인 병원균을 옮기느냐였다.

말일자 석간 신문을 펼쳐 든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면 하단부에 5단 통으로 깔린 광고에 눈길을 모았다. 그것은 일제의 조선 침략이 지금도 계속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 놓고 있었다. 그것을 읽은 미우라는 말할 것도 없고 마충길과 이동박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질겁했다.

광고의 제목은 ｢와룡 선생(臥龍先生)이 해답을 내리다｣였다.

첫째는 [정감록]에 대해서였다.

<역대 이 나라에 내려온 참서에 [정감록]이란 게 있다. 술가(術家 ; 예언자)들은 말하기를 이 책은 고려사람 정감이라는 예언가가 기술하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조선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정감록]이라는 참서는 고려말에 생긴 것도 아니고 후대에 이르러 위찬(僞撰) 한 것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이유가 깨알같은 작은 글자 속에 숨어 있었다.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모든 도참서를 불지른 적이 있었다. 이때 나타난 금서 목록엔 [정감록]이 없었다.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식자들은 홍문종의 [순오지(旬五志)]를 이용해 이씨들이 계룡산 아래 이르러 그곳을 전도(奠都)로 삼으려 한 일을 들먹였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곳은 존읍(尊邑;鄭)이 있어야 할 땅이니 속히 떠나라’하여 왕은 그 말을 좇아 한양에 터를 정했다는 것이다. 굳이 [정감록]에 대한 기원을 억지로 주장하자면 이때로 보는 게 무난하다.

그렇다면 어느 때 [정감록]이 나타나는가를 좀 더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명종 때 예언가로 이름을 날린 격암 남사고 선생이 생존시 [정감록]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없었다. 물론 그 후대에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확실하게 구분을 지어 [정감록]은 이때 만들어졌다고 주장할 만한 전거(典據)가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와룡 선생은 해답을 내렸다.

<고려 시대 이래로 조선에는 수많은 비기와 참서가 있었다. 조선의 개국 초 왕명으로 비기와 참서들을 모아 불을 질렀으나 [정감록]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세조 · 성종 대에도 열일곱 종이 넘는 참서류가 있었지만 이때에도 [정감록]은 없었다.

[정감록]은 근거 없이 태어난 허탄한 서책이다. 이 책은 선조 때 분당되어 사직이 흔들리고 섬나라 오랑캐들이 임진년 왜란을 일으키자, 그 이후 나라를 원망하던 선비와 술사들이 지어낸 글이다. 나라를 저주하려는 계획을 세워 조정에 대한 원한을 다른 쪽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도령이라는 신인은 애당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와룡 선생의 주장이 약간 흔들렸다.

<임진년 왜란을 일으킨 왜인들은 조선에 들어와 9번대로 나누어 진격했다. 이때 3번대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왔다. 성주의 무계(茂溪) · 금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했다. 그는 훗날 크게 패할 때까지 선비와 술사들에게 보고 들은 도참을 적어 그것을 [정감록]이라는 이름으로 퍼뜨리게 하였다. 이것은 훗날을 도모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와룡 선생은 두 번째 물음을 접한다. 그것은 정도령이라는 신인(神人)이었다.

<정도령은 어떤 사람인가? 만약 정씨가 나라를 계룡에 세운다면 당연히 왕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감록]이 세상에 알려진 이래 게나 고동이나 참서의 형식으로 도참을 끄적거렸다. 그 첫째는 [정이감여론(鄭李堪輿論)]이다.

이를테면 송악은 왕씨의 4백년 땅이고, 한양은 이씨의 3백년 땅이다. 계룡은 정씨의 5백년 땅이며, 가야는 조씨의 8백년 땅이다. 팔공은 왕씨의 7백년이나 천년의 땅이고, 완산은 범씨가 왕이 되는 땅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할 일없는 도인이나 거사들이 쓴 [감인록(鑑寅錄)]을 비롯해 [운기귀책(運氣龜策)] 등과 차이가 없다. 약간의 가락이 덧붙여진 [동차결(東車訣)]을 보면 정도령이 누구인지 나타난다.>

[동차결]을 지은이는 이경운이다. 책이름의 동은 해동(海東 ; 조선)을 뜻하고 차는 지남차의 뜻으로 장차 자손들의 운명을 알려준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는 정도령의 이름을 홍도(紅桃)라 했다. 자는 정문(正文)이며 무모생으로 계룡산에 건국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세하게 밝힌 것은, 후손들이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와룡선생의 답변은 약간 우회적이었다.

<신인으로부터 일러 받은 정도령의 본색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정도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내세워 역모 사건에 휘말려 참살 당했다.>

일제시대엔 자구를 제나름대로 해석하여 유사 종교 단체들이 교세를 확장하는데 이용했다. 이를테면 천도교에서는 ‘5만년 무극의 대도로서 장래 세계를 통일한다’ 하였고, 청림교는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켰다. 흠치교 · 태을교 등도 합세하여 한몫을 거들었고, [정감록]을 믿고 정도령을 따르는 비밀결사까지 생겨났다. 바로 이러한 맹점과 허점의 쓰레기를 한곳에 모은 게 [격암유록]이라는 지적이었다.

<나는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을 보면서 이 땅에 구로다(黑田)의 망령이 되살아 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내 생각엔 ｢서삼릉의 미스테리｣도 그의 지략이다. 그가 올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어둠을 몰고 그가 올 것이다.>

그가 오는 것을 와룡 선생은 기다리고 있다고 막을 내렸다. 광고의 끝부분에는 오래 전 와룡회 회원들이 사용한 ｢격암가장결｣이 인용되었다. 즉, 새해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신의 능력을 구사하는 성인이 나타나 마귀를 죽이고 그 종자의 씨를 말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성인은 품에 와룡패를 지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