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새벽에 그곳에서 나온 둘은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했다.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 같아 서미애는 평소에 쓰지 않던 선그라스를 걸친 채 업무를 보았다.

“아침 일찍 마충길 대령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쪽에서 내놓은 찬조금 액수가 적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대만에 출장 가신 이상철 회장님에게 연락을 취할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보름 후면 돌아오실 텐데. 복잡한 문제는 그때 가서 의논드리죠. 것보다도, 지난밤에 마신 ｢옥방회춘주｣는 약성이 너무 지나친 것 아네요. 전 집에 가서 한숨도 못 잤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약간은요.”

김시우는 ‘회의중’이라는 패를 바깥 출입문에 걸어 두고 새로 온 비서에게 일러두었다.

“전화는 물론 일절 출입을 통제시켜요. 30분 정도. 알겠어요?”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FM 선율을 즐겨 듣던 비서실 아가씨는 이어폰을 뽑은 채 방싯 웃었다. 김시우 역시 한쪽 눈을 찡긋거린 채 문을 닫았다.

“역시 당신의 향기는 좋아요.”

김시우는 그녀의 뒤쪽에서 머리카락 냄새를 맡았다. 왼손으로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오른손으로는 가슴께를 비벼 나갔다.

“안돼요, 여기선 무모해요. 문도 안 잠갔잖아요.”

“괜찮아요. 오히려 문을 잠그는 게 더 위험하죠.”

“그래도 안돼요.”

“왜 안됩니까?”

“회장님을 배신할순 없어요. 우리들의 불장난은 한 번으로 족해요. 사실 내가 원했던 건 아니었어요. 새로이 개발한 ｢옥방회춘주｣의 약성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한 거죠.”

여전히 김시우는 딴청이었다.

“난 하룻밤 내내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결혼합시다.”

“난 이회장님을 위해 살기로 한 몸이에요. 누구에게도 시집갈 수 없다는 걸 김상무님이 잘 아시잖아요.”

김시우는 스커트 아래 손을 집어넣었다.

“안돼요. 난 이회장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것을 동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요. 어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르겠어요.”

“우리 사이에 자꾸만 이회장을 끌어들이지 말아요. 사내 구실을 못하는 그 사람 얘긴 없었으면 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 알아요. 당신은 내가 없으면 살지 못해요. 엊저녁만 해도 그래요. 당신의 몸은 내 손끝으로 연주됐어요. 아름다운 콧노래가 나오고 감미로운 멜로디에 함께 취했잖아요.”

김시우는 무슨 생각에선지 저고리 안 포킷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입안에 잔뜩 바람을 채워넣더니 심호흡을 몰아쉰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따미(熱海) 밀실에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미즈 그룹의 마사오와 무라야마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인 무라야마 마사끼, 그리고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는 늙은 너구리 미우라였다. 팽팽한 분위기를 다독거린 건 역시 미우라였다.

“그동안 우리들이 준비해 온 대한(對韓) 사업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습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에 우리 삼합회(三合會)가 발판을 마련한 것은 여러분들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신년에는 구로다(黑田) 회장님께서 몸소 한국에 건너오시어 진두의 일선에 서실 겁니다. 회장님께서 오시기 전에 나름대로 사업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여러분을 이곳까지 모시게 됐습니다. 사업성과에 대해 마사오 상이 먼저 말씀하시죠.”

마사오가 느릿하게 말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 그룹에서는 주로 성기구 판매에 역점을 둬 왔습니다. 증권 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한국의 경제 전문가들이 우리 그룹의 한국 진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3개월전 LA에 있는 유태계 미국 은행 ｢칼츠｣를 인수한 것을 원인으로 추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편법이 필요하다는 계산서를 내놓았다.

“한국은 자원이 풍부한 나랍니다. 이 나라에서 내버려 둔 자원을 우리가 개발시키는 겁니다. 그에 대한 첫사업으로 생수 개발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생수는 ‘살아 있는 물’로서 미네랄과 철분 함유량이 높다. 한강 상류가 오염됐다느니, 오염 물질을 여과시키는 기계 작동에 문제가 있다는 신문 보도가 잦고 보니 근자에 와서 시민들의 생수 선호도가 높았다.

“증권 투자가 보류 상태고 보니 현재로선 정력주를 주력 상품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까?”

“이회장이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신병 치료차 대만에 갔으니 아무래도 1월 중순에나 협상이 가능할 듯싶은데요.”

“갑자기 대만에 간 이유가 뭡니까?”

“건강을 핑계 삼고 있지만 우리 쪽에서 보기엔 정력주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만의 ｢신화원(新華源)｣이란 회사와 주정(酒精) 계약차 떠났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 점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쪽은 김시우 상무가 손  쓰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듯싶소.”

미우라는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32인치 소니 티브이에 화면이 살아 돋았다. 벌거벗은 청춘 남녀의 거리낌 없는 러브 씬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허우적거리는 쪽은 서미애였고, 김시우는 어린애를 어르듯 계집의 몸을 탐닉했다. 미우라가 덧붙였다.

“저걸 보니 주식회사 무극 쪽은 안심해도 되겠어.”

미우라는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의 화면을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