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엇 하나 정리된 게 없잖아요. 부도덕한 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오히려 애국자로 둔갑해 날뛰잖아요. 돈과 힘이 있는 그들 앞에 우리는 얼마나 무력합니까. 무력한 우리 힘으로 그들을 내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어떤 모임을 결성하기도 하고 또 외부의 비호 세력으로 무장하기도 해요. 맨주먹으로 그들과 싸운다는 게 얼마나 무모합니까. 위정자들은 그걸 모르드라고요!”

이동박은 기회라 여겼는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스캔들｣ 잡지의 박부장과 탁원제기자가 실종됐는지 그 이율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의 실종이 ｢서삼릉 미스터리｣와 관계있는 것 같은데, 정기자 생각은 어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확신까지는 뭣하지만, 박부장이 실종되기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얼마 전 일본인들의 한국 관광이 유행병처럼 퍼지자 ｢서삼릉 미스터리｣를 발표하는 게 어떠냐 싶어 말했었죠. 그때 박부장은 단호했거든요. 모처럼 관광 경기가 살아났는데 찬물을 끼얹을 순 없는 일이라고요.”

이동박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목소리를 깔았다. 처음과는 달리 아예 방법을 바꾸었다.

“좋시다, 우리 동업합시다!”

“동업이오?”

“어차피 한 배를 탔으니 죽든 살든 함께 해보자는 겁니다. 일이 잘되면 정기자나 나나 한밑천 잡는 거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사실 대한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연 것도 좋은 기삿거리 찾자는 거지 특별한 게 없어요. 내가 종일 사무실에 앉아 해묵은 기사나 뒤적거리고 있어 봐요. 모두들 불평불만이 터져나올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쪽에 특집부를 만든 거죠. 아시겠지만, 필요 경비는 사장님 친구분이 부담하신 거구.”

“….”

“오늘 정기자가 나를 만나자고 한 의도는 공생 공존이 아니었나요? 그럴 의도면 잘 찾아온 거구, 다른 생각이라면 크게 실수한 겁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정기자가 나를 찾은 건 협상의 차원으로 보는데?”

이동박은 감춰진 부분을 좀더 드러냈다. 어쩌면 공염불이 될지도 모르는 사안에 대해 일찍 매듭을 지으려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그는 스무 명의 명단 위에 ｢대외비(對外秘)｣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A4 용지를 정문호에게 건네주었다.

“어차피 꺼낸 일이니 매듭을 지읍시다. 내가 정기자한테 속일 일 없는 거고, 또 한 배를 타기로 했으면서 구차하게 큰일 작은 일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정기자와 난 많아야 7년 차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우리 화끈하게 한판 벌이지 않겠소!”

정문호는 다시 한 번 명단을 훑어보았다. ｢한국 부동산 컨설팅｣ 장민호 회장이 앞자리에 이름이 올라 있고, 그 아래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런 것도 싶은 이름들이 씌어 있었다. 명단을 돌려 받으며 이동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정기자도 잘 알겠지만, 12.12라는 하극상을 일으킨 군부가 쉽게 군으로 복귀할 거란 생각을 했다면 그건 오산이오.”

“그럼?”

“머지않아 큰바람이 몰아칠 게요. 제2의 혁명이라고나 할까. 내가 보기엔 그렇소. 총을 차고 칼을 휘두르는 자가 어찌되었건 힘있는 것 아니오. 거부한다면 그 자리에서 명줄이 달아날 거구.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라를 팔아먹을 일이 아니라면 둥글둥글 사는 게 세상살이의 요령이구요!”

이동박은 쩌업 혀끝을 충돌시키고 나서 덧붙였다.

“하극상이든 혁명이든 큰바람이 불 때엔 필연적으로 따르는 게 깡패 소탕이며, 그 다음이 부정 축재자에 대한 책벌이오. 5.16 이후 증권 파동이다 빠찡꼬 사건이다 사회가 시끄러웠던 것은 모두가 혁명 자금이 부족한 때문이었잖소. 이번도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면 부정 축재자로 몰겠다는 겁니까?”

“정경 유착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법적인 측면에서 다루겠죠. 우린 그런 쪽이 아녜요. ｢한국부동산 컨설팅｣의 장민호 회장처럼 많은 토지와 자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경유착이니 비리니 하는 꼬리가 보이지 않은 자들을 상대합니다. 재산은 상당한데 비리가 보이지 않은 자들, 그 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이쪽 사무실이 필요한 거죠. 지금 와서 일제 시대에 매국했다는 걸 부각시킬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파악도 쉽지 않고요. 그러니 정기자가 도와주시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반대 급부는 있어요.”

그는 정상필의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지갑에서 1백만 원권 수표 석 장을 꺼내 놓았다.

“가지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소.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2백을 더 드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