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심각하게 얘기를 받아들였다.
“주로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글쎄요….”
멈칫거리는 정문호 앞에 두툼한 돈 봉투 하나가 놓아졌다.
“그건 정기자님이 이곳까지 오신 수고빕니다. 제 성의니 아뭇소리 말고 받아주시오.”
이렇게 되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어요. 음, <상>으로 나뉘어진 부분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대군들의 태호(胎壺 ; 태 항아리)에 대한 분포도였죠. 어느 산에 어느 분의 태 항아리가 묻혀 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중>에는 서삼릉에 태실을 조성한 경위와 배경, 그리고 태실에 대한 배치 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죠. 그리고 <하>에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태실을 서삼릉에 조성했으며, 태가 담긴 항아리들이 어디로 사라졌는가를 추적 기사로 다루었어요.”
“그래요?”
“추적 기사라지만 뜬구름 잡기죠. 상상력을 동원하다 보니 해괴망측한 풍수 용어까지 나오드라고요. 그런 기사야 할일 없는 사람들 시간 땜빵하기엔 아주 좋을 거예요.”
“그 기사, 복사해 줄 수 있나요? 수고비는 넉넉히 드리리다.”
노인이 곁에 앉은 청년에게 턱짓하자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청년은 20여 분쯤 후에 들어와 노인의 무릎 가까이 두툼한 봉투를 놓아두었다.
“것보다두 영감님, 한 가지 물어도 되겠어요.”
“그러시오.”
“저희 잡지사에 근무한 전임 취재부장에 대해 아십니까?”
“오, 박일우 부장.”
“예에.”
“잘 아는 편은 아니오. 직접 면대해 얘기를 나눈 건 아니니까. 원래 ｢서삼릉 미스터리｣는 정공칠이가 주간지 특집부장으로 근무할 때 만들었던 기삽니다. 그걸 만들 때 나 역시 일조(一助)했었죠. 당시 동경에 사무실을 둔 ｢무라야마 역사문제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는 하세가와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도 나였어요. 그리고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풍수사들을 정공칠 부장에게 소개시킨 것도 나였구요.”
“….”
“이유는 단 하나. 궁금증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사건과 추적｣이라는 주간지에 실리기로 한 기사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정공칠 부장은 그렇다 치고, 함께 동행 취재했던 기자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소. 그러다가 ｢스캔들｣ 잡지에 그런 기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 거요. 내가 알아본 바로는 실종된 주간지 기자와 박부장은 선후배 사이라는 말도 있고, 그래서 이렇게 정기자님에게 전화를 드린 겁니다.”
대화는 일단 이것으로 끝났다. 음식점을 나서는 그에게 봉투 하나가 다시 찔러졌다. 예의 서른 살 남짓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속삭였다.
“사장님께선 그 기사를 원하십니다. 복사본을 파기시키시고 원본을 가져오는 비용입니다.”
봉투에는 십만 원권 수표 열 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동박에겐 돈을 받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이동박이가 언짢은 표정으로 입맛을 쩝 다셨다.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 위를 토닥거리고 나서,
“그렇다면 보판 기사를 넘겼다는 얘깁니까?”
그는 다짜고짜 넘겨짚었다.
“넘기긴 뭘 넘겨요. 찾아보겠다고 했죠. 난 그쪽 전화 번호를 몰라요. 그러니까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죠. 하긴 심심파적으로 장난질 칠 수도 있죠. 그런 일 한두 번이에요. 모르긴 해도 직원 중 누군가가 장난질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나를 만나자고 했어요?”
“아주 중요한 얘기가 생각났거든요. 제가 이 기사를 박부장님에게 받았을 때, 기사와 상관없이 원고 한 귀퉁이에 메모된 게 있었어요. 무슨 한시 같았거든요.”
“한시요?”
“｢추사(秋思)｣라는 내용이었어요. ‘이 병은 가을 탓으로 생긴 게 아니고, 오로지 일봉이 그리워 생긴 거라네. 사랑은 깊고 아늑한 바닷속 같았는데, 밤마다 아픈 이 마음 어찌 하리오’라는.”
“한글이었어요?”
“아녜요, 한시루요.”
“한시라….”
“처음엔 무심코 넘겼었어요. 지난 10월과 11월호 제작을 앞두고 사회정의당 김성진 부총재와 여당의 중진 신기섭 의원 간의 돌출 기사가 준비됐었죠. 10. 26이 터지면서 그 기산 중단됐지만, 여타 월간지에선 탤런트 윤모양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니 뭐니 시끄러울 무렵이었죠. 근데 ｢추사｣라는 시가 윤모 양이 걸친 목걸이에 새겨져 있다니까 연예계 기자들을 꽤 흥분시켰죠.”
“그래요?”
“며칠 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박부장이 초고 원고를 만들 때 끄적거린 내용은 분명 어떤 메시지가 있을 거라구요. 처음엔 한시를 놓고 어렵게만 생각 했었죠.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몇개월 전 호화 분묘를 다룬 기사가 있었는데, 우연찮게 ｢한국부동산컨설팅｣ 장민호 회장의 선산에 관한 기사였죠.
그곳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요지(陶窯地)인데 출입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운 ｢추사정(秋思亭)｣이라는 정자가 떠오른 거죠. 일제가 수탈한 태 항아리를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곳 어디에 감춰뒀을 거란 얘길 들은 적이 있거든요.”
“일리 있는 가설이오. 정기자, ｢서삼릉 미스터리｣에 대한 기사는 어딨습니까?”
“여깄어요.”
“어디 봅시다. 이게 쥐 잡는 망치 구실을 할지 아니면 속빈 호두 껍데기를 치게 될는지 알 수 없지만.”
이동박의 눈길은 기사 위를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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