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민속주점 오작교(烏鵲橋)엔 젊은이들의 혈기가 넘쳐흘렀다.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 것일까.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고치를 만드는 누에처럼 끝없이 얘기의 실타래를 풀고 있었다.

정력에 좋다는 복령주(茯笭酒) 세 항아리를 비운 정문호의 낯빛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벌써 한계 주량을 넘겼다는 뜻이다. 그는 뒤늦게 나타난 이동박을 향해 투박한 질그릇 잔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나오시라 해서.”

“그러잖아도 정기자와 할 얘기가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정문호는 습관적으로 되물었다.

“뭔데요?”

“보판(保版)된 기사 목록엔 ｢서삼릉 미스터리｣라는 게 있습디다만, 파일을 뒤졌어도 기사는 보이질 않던데 누군가 빼돌리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생기겠어요. 정기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다르다, 어떻게요?”

“것보다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말하세요.”

“박부장님이 처박아 둔 기사를 찾는 이유가 뭡니까?”

“물론 필요해서죠.”

“이유를 알면 안 됩니까?”

이동박은 구부린 상체를 약간 뒤쪽으로 당기며 담배를 빼물었다.

“이런 말하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소만, 얼마 전 민사장의 동문 후배께서 사무실을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건 정기자도 알 겁니다.”

정문호는 질그릇 잔에 반쯤 찬 복령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 전부터 일본인들의 한국 관광이 이어지고 있잖소. 예전 같으면 제주도에 들어가 기생 파티라는 걸 즐겼을 터인데, 어찌된 셈인지 모두 전라도 쪽으로 여행을 한대잖아요. 이것을 놓고 풍수 전문가들은 그쪽 방향에 남악(南岳)이란 게 있으니 거길 찾아간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거기 어디쯤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도 합디다.”

이동박은 질그릇 잔에 가득 채운 술을 반쯤 마시고 나서 뒷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북악이 있으니 남악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남도지방에 보물이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거죠. 만약 일본 아이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당연히 우리 문화재일거요. 우리 문화재야말로 보물이 아니고 뭐겠소.”

“….”

“새삼스럽게 지난 일을 들춰내 소용이 있겠냐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정기자,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조선총독부 시절 일본 관리들은 전기응이라는 풍수사를 통해 어떤 짓을 자행했습니까? 이 나라 금수강산에 쇠말뚝을 박지 않았소. 그것도 부족해 좋다는 혈자리는 토막내고 문화재는 수탈했습니다.

이게 무얼 말합니까? 바로 민족 정기의 말살이오. 일본의 도자기를 전시한 아카다 컬랙션에 모습을 드러낸 월산대군의 태 항아리 역시 그들이 수탈해 간 우리 문화재의 일부에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수탈할 때의 방법입니다. 군부에서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접근하되 심도 있게 파고들 모양입디다.”

“….”

“도와주시오.”

정문호가 한 걸음 물러났다.

“잡지사 안엔 이런저런 말이 떠돌고 있잖아요. 편집부 직원들이 물갈이 당한다거나, 취재부도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한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아, 그 점은 걱정할 것 없어요. 정기자만 좋다면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있을 수 있으니까. 자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어제 오후 사장님이 ｢서삼릉 미스터리｣에 대해 말씀 하시더라구요. 보판된 원고를 어디에 뒀냐고 난리를 쳤어요. 그 일 때문에 편집부 직원들이 덤터기를 썼는데 사실은 제가 치웠거든요.”

“갑자기 왜 치웠죠?”

“갑자기는 아니죠. 이부장님 입사하기 사흘 전이니까요. 퇴근 시간 무렵 전화가 왔더라구요. 박부장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니 만날 수 있겠냐구요. 그래서 상대가 정한 약속장소로 나갔죠.”

“어디였습니까?”

“일식 전문 음식점 ｢아따미(熱海)｣요.”

“아, 그곳.”

“저를 기다린 분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과 서른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였어요. 성함은 물어 보질 못했는데 그 노인은 따뜻한 눈길로 나의 신변잡기만 묻더라구요. 사는 곳, 교우 관계, 가족 관계 등등 그냥 그런 얘기였죠. 식사 끝내고 간단히 술자리가 벌어졌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죠. 물론 그들이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그 동안 어떤 경로로 추적을 했는지 모르지만 노신사는 ｢서삼릉 미스터리｣라는 기사가 최종적으로 정문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삼릉 미스터리｣는 나와 인연이 많았던 정공칠 부장이 주간지에 재직할 때 만들었어요. 그것이 어떤 경로로 ｢스캔들｣ 잡지까지 흘러갔는지 모르지만, 그 기사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화약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어떤 점에선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소지가 다분하구요.”

노인의 말에 정문호는 반론을 제기했다.

“아닙니다 영감님, 몇 번 읽었지만 그런 내용이 아니던데요.”

“내용을 말해 줄 수 있겠소?”

“그 원고는 선배 기자인 탁원제 씨가 내게 준거니까 한 5,6개월은 지난 거로 봐야겠죠. 처음 기사를 받았을 땐 꼭지가 세 개였어요.”

“꼭지?”

“원고 묶음이 세 가닥이었다는 뜻입니다.”

“상중하로 나뉘었습니까?”

“네에, 그 기사는 상중하로 분류돼 있었어요. 물론 기사를 작성한 건 박부장이었지만 문장의 앞뒤 연결이 안된 데다 어찌나 흘려 썼는지 알아보기 힘든 곳이 많아 내용을 정서하느라 제가 만지게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