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차석만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동박이었다. 그는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이봐요 차선생, 어쩌면 이번 달에 그놈의 현금 보관증 건은 마감 지을 것 같아.”

“아, 그래요!”

반색하듯 낯빛을 폈지만 내심으론 개새끼를 연발했다.

“그 사람들 어찌나 깐깐한지 내 말이 맥히지 않아. 그치만 내 솜씨 알잖아. 부르도쟈처럼 밀어붙이는 파워 말이야.”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훌쩍 양주를 털어 넣었다. 이내 품안에서 두 번 접은 A4 용지를 꺼내 탁자 위에 쫙쫙 눌러 폈다. 거기엔 대략 스무 명 남짓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선생, 이 가운데 아는 사람 있습니까?”

차석만은 검지 끝으로 짚어 가다 ｢한국 부동산 컨설팅｣의 장민호 회장을 톡톡 찍어 댔다. 곽성필의 안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쳐갔다.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예전에 ｢스캔들｣ 잡지 전임 취재 부장께서 한 달에 한 번 새로운 점법을 실리게 했었죠.”

“그건 들었어요. ｢오늘의 운세｣를 여러 사람이 돌려 가며 썼다면서요.”

“전 당사주법(唐四柱法)으로 운세를 봐줬거든요. 어느 점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당사주법 역시 하나의 공식은 있어요. 그 공식에 의해 한달 동안 ｢오늘의 운세｣란을 맡은 거죠. 근데 전화가 왔어요.”

“장민호 회장에게서요?”

“아녜요. 정공칠 비서실장이었죠. 회장님께서 찾으시니 만나자는 거였어요.”

“흐음, 그래서 만남이 이뤄졌군요.”

“워낙 많은 돈이 있다는 양반이니 만나고도 싶었죠. 그치만 그럴 수 없었거든요.”

“칠성회 회원들이 나눈 구역 때문이었나요?”

“그걸 어떻게?”

“박부장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칠성회 직제표라는 게 나옵디다. 거기에 구역은 어느 회원이라도 서로 건들어선 안된다는 말이 써 있습디다.”

차석만은 순진하게 믿어 버렸다.

“그 때문에 다른 회원에게 소개시키려 했는데 정실장님이 저를 찾아왔더라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따라 나선 거죠. 나중에 소개를 시키더라도 무슨 내용인질 알아야 했으니까요.

저를 찾은 건 사설 경호원들의 관상 때문이었어요. 사실 조직 사회에선 누굴 믿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생명과 관계있으니까요. 내가 그곳에 가서 했던 건 세 사람의 관상을 본 게 전부였어요.”

언뜻 이동박은 닷새 전에 이곳에서 만난 박봉구(朴鳳九)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술에 취하자 몹시 괴로워했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칠성회 멤버를 건드린단 말인가. 그 동안 되는 짓 안 되는 짓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 그런데 자네가 우리 회원들을 줄줄이 엮어 대니 내가 좀이 쑤셔 못 견디겠어. 우리 말이야,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아무리 고향 선후배 사이라지만 회원들 등치는 건 마음이 편칠 않아. 특히 차석만은 거짓말이라곤 아예 입에 올리지도 못해. 그런 사람을 내가 죽을 자리로 내몰았단 말이야.’

박봉구는 석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다 간다 말이 없이 그렇게 나가 버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른 점쟁이들과는 달리 차석만만큼은 아직도 순진하다고 이동박은 믿었다. 그는 직선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동안 차선생과 정공칠은 여러 차례 만난 거로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서 이상한 기미를 발견했을 거 아닙니까? 사고 나기 전날에도 차선생과 만났었잖아요.”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리구 정실장의 죽음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도 차선생님이었구요? 어디 사고가 난 날의 얘기나 들어봅시다.”

“그러죠…뭐.”

차석만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 주섬주섬 털어놓았다.

“강변에 있는 정실장님의 별장은 지은 지 여러 해가 됐답니다. 그분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매사에 빈틈없이 대우를 해줬어요.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분은 이상한 얘기를 꺼내드라구요. 자신이 한때 언론계에 있었는데, 우연히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게 됐더랍니다.”

“?….”

“왜 그곳을 지나가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곳 어디에서 좌판을 벌인 점쟁이 노인을 만났더랍니다. 신선처럼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인은 어림잡아 일흔이나 여든 살은 족히 돼보이더래요. 좌판 앞을 지나가는데 노인이 불쑥 그런 말을 하드래요.”

이동박은 눈 한번 깜짝 않고 차석만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귀는 개미가 발길질하는 소리도 들을 만큼 열려 있었다.

“어허, 아깝다. 일락유수하(日落流水下)하니 영별설강시(永別雪降時)로세.”

정공칠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는 노인 앞에 무릎을 세워 앉은 채 만원권 한 장을 내려놓았다.

“영감님, 무슨 뜻입니까?”

“허허허, 굳이 되새김질할 필요가 어딨는가. 내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하긴 복채를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겄지. 자네 운수를 보아하니 언뜻 그런 말이 떠오른 게야. ‘해가 흐르는 물아래 떨어지니 눈 내릴 때 영원히 이별하도다.’ 음미해 보면 얻는 게 있을 걸세.”

정공칠이 엉거주춤 일어서자 노인은 한소릴 더 게워 놓았다.

“복록수(福綠壽)를 헤아리는 법술은 여러 가닥 같지만, 그것은 흐르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든 것과 같은 이치네. 그 옛날 마의(麻衣)나 수경 선생(水鏡先生)은 상대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일생 운수를 뽑아냈다오. 나는 그들의 법술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오랫동안 좌판을 벌이고 앉았으니 겨우 흉내는 낼 수 있어요. 젊은이가 스물일곱을 넘겼다면 서른다섯이 고비일게요.”

그 당시는 허허 웃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난 것은 세 해가 지나서였다. 언론계를 떠나 장민호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할 무렵은 서른다섯이었다. 이동박이 잠깐 얘기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