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님이 뒷조사를 시킬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멀쩡한 서방 놔두고 점쟁이와 놀아날 줄 어찌 알았겄는가. 그나저나 당신 통도 커. 으떻게 남편 있는 여잘 데불고 놀 생각을 했으까잉.”
“죄송합니다.”
“죄송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살집 좋은 사내가 다가왔다.
“어야 이렇게 하세. 당신 말이야, 우리 성님한테 끌려가면 어디가 부러져도 부러질 것이구만잉.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뜨리듯 한쪽 다리는 작살낼 거구, 그 다음으로 갈비뼌가 척춘가를 와지직 부러뜨릴 것이어잉. 긍께 당신은 큰일나뿌럿어잉. 자, 자! 떨고 셈하고 어쩌고 할 필요 없이 2천만 원만 내놓으소.”
“비싼 것 같애? 그럼 말이시 손가락 2개만 자르세. 한 개에 천만원씩 치지 뭐.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자르면 구색이 맞을 것이구만잉.”
“저기···, 선생님.”
“선상님이고 나발이고 으떻게 할거야. 손가락 두 개를 자를 거야, 2천만원 내놓을 거야!”
“그렇게 큰돈이 어딨습니까.”
“당장 내놓으란 게 아니야.”
“그…럼?”
“2천만원짜리 현금 보관증 하나 써 줘. 한 1년쯤 후로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벌어서 갚으라고! 알겄어? 돈이 아까우면 손가락 자르던지. 그러잖아도 도루코 면도날을 사왔으니께 이것으로 두어 시간 갉아 대면 손가락 하난 잘라질 거야. 으째, 시작해보까?”
“아이구, 현금 보관증 써 드리겠습니다.”
철학관으로 돌아온 차석만은 화병으로 드러누웠다. 2천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액수도 그러했지만, 점치는 점쟁이가 꽃뱀에게 속았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닷새 후. 저녁 7시가 거의 됐을 무렵 방문객이 있었다.
“나는 ｢사건과 추적｣이란 주간지의 이동박 부장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정희주라는 여잘 아시죠?”
“정희주라면.”
“꽃뱀 말입니다. 그 계집이 놓은 덫에 걸린 적 있죠? 그년이 잡혔으니 안심하세요.”
“예에?”
“더 이상 피해 볼일은 없다는 얘기죠. 사실 정희준 불쌍한 아이에요. 내 사촌 동생의 친구인데 전화를 했드라고요. 작두파라는 조직의 보스가 공갈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했답니다. 마침 아는 친구가 시경에 있어 도움을 받았어요. 그 친구들 모두 딸려 갔으니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그리구 희주 그 아이 용서하세요.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차선생 같으신 분에게 피해를 입히게 됐습니다만, 근본은 괜찮은 얩니다. 길 가다 한차례 소나기를 맞았다고 생각하시고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들한테 무슨 증서 같은 걸 안 받았나요?”
“아, 현금 보관증 말입니까.”
“예에, 예.”
“그건 지하 금융 조직에 넘겼답니다.”
“그게 무슨….”
“현금보관증같은 건 깡을 해주거든요. 신원만 확실하다면요. ｢차석만 철학관｣이야 세간에 널리 알려졌으니 현금 보관증을 깡해 줘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깡해 줬겠어요.”
그는 차석만의 핏기가 사라진 낯빛을 흘끔거리며 희망을 주었다.
“어디다 어떻게 했는진 모르지만 제가 알아보죠. 그 일은 나한테 맡기시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석만은 싫다는 내색 한 번 못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입에 올렸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상황이 서소문에서 철학관을 연 옥필호(玉畢鎬)에게 벌어졌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몹시 분개했다.
“형님, 이럴 수 있소! 뭐 처먹을 것 있다고 점쟁이를 등쳐요. 정희주란 년도 그렇고, 어쩌구저쩌구 잡소리 늘어놓으며 현금 보관증 챙긴 이동박이란 놈도 한통속이라니까요. 그것들이 완전히 통빡 굴렸어요. 형님한테는 강원도 양양에 시아버지 묏자리를 썼다고 했다면서요? 나한테는 뭐 장승혈에 묻었는데 관(棺)이 저번 장마에 휩쓸려 갔다나요. 증말 열 받아 죽겠네. 이부장인가 하는 그 새끼 어떻게 우리 일에 관련됐는지 모르겠어요. 형님, 이참에 애들이라도 시켜 밟아 버립시다.”
차석만은 점잖게 나무랐다.
“이 사람아 그렇게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 아니야. 이부장이 진짜로 현금 보관증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확실한 게 나오기 전까지 모른 척해. 그 자식 찾아오면 반갑게 용돈을 좀 챙겨 주고. 알았어?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입니다.”
“뭐가?”
“일이 주일 간격으로 ‘칠성회’ 회원들이 당했거든요. 형님과 내가 마지막이고, 제일 먼저 당한 건 마천수 회원이랍니다. 그 다음이 박봉구고 이어서 고창수 · 서문기 · 민도국 순으로 피박을 쓴 거죠. 형님과 나만 정희주란 년이 꼬릴 친 거구 다른 회원들에겐 무당이며 바람난 과부들이 나타났나 봐요. 자세한 것은 만나 봐야 알겠지만 내가 들은 바론 그래요. 칠성회 회원들만 골라 장난을 쳤거든요.”
“글쎄 우리가 칠성회를 만든 것은 박부장과 공
탁기자, 그리고 유상희만 아는 일이잖아.”
“그렇죠.”
“박부장과 탁기자는 연락이 끊겼고, 유상희가 뭔 일을 저질렀다곤 생각이 안 드는데.”
“그러니까 이상하죠. 우연히 일어났다고는 보기 힘들잖아요.”
“조사를 해봐야겠구먼.”
은밀히 조사하기는커녕 벌써 3개월째 끌려 다니고 있었다. 익명으로 고발하는 게 어떨까를 이리저리 저울질했으나 그것도 최선책은 아니었다. 너구리같은 이동박이 호락호락 당할 위인인가. 빠져나갈 길은 확실하게 열어 두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여차 실수 하는 날이면 낭패를 당할 공산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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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