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보건전문대 아랫길을 타고 오르면 낯익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녀를 상징하는 두 그림자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이곳을 오가는 술꾼에겐 주머니 속의 라이터처럼 낯익은 이니셜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의 주머니를 생각해 민하연(閔霞延) 여사가 고심 끝에 만들었다는 ‘주식회사 하연(酒食會社 霞延)’이란 애칭으로 통하는 비즈니스 클럽.

예전에는 클럽 자리에 한식 전문 식당이 십수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여고 3년생인 하연은 그 길로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물론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식당의 대물림이었다. 그러나 술꾼들의 취향이 바뀌더니 한식당은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클럽으로 변했다. 6개월 전이었다.

이 클럽은 모든 안주가 일금 만원의 균일가이고, 술값도 시중의 절반이어서 지갑이 얇은 샐러리맨들이 바글거렸다. 이제는 충무로의 명물이 된 비즈니스 클럽, 바로 이 클럽에 이동박은 사흘에 한 번 꼴로 나타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무당, 포르노 영화감독, 3류 여배우, 금고 털이 전문범, 형사 정보원, 점쟁이, 구두닦이, 미장이, 소매치기 등등 직업적으로 완전히 잡화상이다. 대학교수  같은 분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가뭄에 콩나는 격이고 대부분 세상을 버겁게 살아가는 속칭 ‘나홀로 타입’이다.

오늘 약속은 자하문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는 차석만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인 7시에서 20분은 일찍 나와 양주 작은 것 한 병과 과일 안주를 시켜 놓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 이마에 깊은 골이 몇 가닥 패어 있었다.

‘염병할 새끼.’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두 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날 밤의 사건은 부마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10월 14일이었다. 피곤기가 온몸으로 번져 가는 저녁 7시 무렵. 접수를 맡은 박양을 퇴근시키고 잠시 쉬고 있을 때, 20대 초반의 여인이 선글라스를 낀 채 철학관으로 들어왔다.

“차선생님에 대해선 얘길 많이 들었어요. 여러 잡지에 기고하신 글도 읽었구요.”

“아, 그래요? 어떻게…오셨습니까?”

차석만은 갑자기 나타난 여인의 의도를 탐색했다.

“궁합을 보러 오셨군요?”

그 나이엔 남녀 궁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틀렸다.

“남편 때문에 왔거든요.”

건너편 소파에 앉은 그녀의 몸에선 젊음의 향기가 꽃처럼 풍겨 났다.

“2년 전 연애 결혼했어요. 얼마나 운수가 사나웠던지 신혼 여행길에 교통사고가 났지 뭐예요. 척추를 다친 남편은 평생을 누워 지내야 한다니 이년의 팔자도 기박하지요. 물론 부부 생활은 어림도 없고요. 시어머니는 화병으로 지난 해 돌아가시고 제가 남편 병수발을 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누구한테 물으니 시아버님 묏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요. 남편의 병이 심해진 것도 그쪽 탓인가 싶고요. 굿을 한 번 해보라는데 그건 내키지 않거든요.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들어오는 문이 있다면, 나가는 문이 왜 없겠습니까.”

“어머, 그래요!”

“시아버님 묻히신 곳이 어딥니까?”

“산도(山圖)를 가져 왔거든요.”

그녀는 세 겹으로 접은 허름한 기름 종이를 꺼네놓았다. 그것은 붓으로 얼기설기 그린 지형도로  산이며 강, 절 등이 부호로만 기표되어 있었다.

“저기, 선산은 강원도 양양인데요 거기 어디에 묘를 쓴 후 우환이 생겼거든요. 집안 남자 분들이 서른을 넘기면 꼭 사고를 당하더라구요. 제 남편도 겨우 서른 하난데요.”

‘강원도 양양이라….’

그러고 보니 점법을 배우러 학원에 다닐 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강원도 양양엔 장승리와 범부리란 마을이 있다. 안성 이씨가 한때 터를 내린 그 지방 전설이었다. 자나깨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씨 집안에서는 이름난 지관을 모셔 와 어떻게 하면 후손들이 출사(出仕;벼슬길에 나감)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얘깁니다. 조상 님께서 이곳에 터를 잡으실 때 묏자리를 산구형(産狗形)으로 정했답니다. 대가 끊이지 않고 자자손손 후손들이 많기만을 기원한 거죠. 아마 벼슬살이에 큰 뜻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후손은 많아졌지만 벼슬길에 나간 분이 없어요. 그러니 가문(家門)을 내세울 명분이 없잖습니까. 이 늙은이의 소원은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가문을 빛내는 겁니다. 내가 죽어 지하에 계신 선영들을 만나면 드릴 말은 있어야잖겠어요. 어떻게 해야 소원을 이루겠습니까.”

집안의 연장자인 이 노인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지관의 제안이 뜻밖이었다.

“소원은 이룰 수 있습니다만 그 대신 과부가 나옵니다.”

“벼슬길이 열리는데 과부가 문제겠소?”

“그것도 여덟이나요.”

“여덟?”

“좋은 자린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법이지요.”

이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여덟이면 어떻고 열이면 어떻소! 벼슬길에 나간다면 스물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소원을 이뤄 드리지요.”

지관은 터를 잡았다. 그때부터 안성 이씨 집안에서는 까닭 없이 남자들이 죽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 일은 1년 사이에 장정 일곱이 죽어 나가자 종문(宗門)이 시끄러웠다.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젊은 남정네를 둔 아낙들이 이 노인에게 몰려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어르신, 벼슬살이도 좋지만 젊으나 젊은 나이에 생목숨이 떨어지면 그깟 벼슬이 무슨 소용 있어요. 남정네들 씨 말리는 일을 중단해 주십시오.”

이 노인의 마음도 흔들렸다. 과부가 생긴다고 했을 때 별 대수랴 싶어 건성으로 여겼는데, 약관의 젊은이들이 층층시하로 죽어나간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온 동네에 과부들의 탄식과 원망이 넘치자 결국 이 노인은 묏자리를 파헤쳐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세월이 흘러 그 자리엔 함평 이씨가 묘를 썼다. 그쪽 집안에서는 사람 대신 말 한 필만 죽었다. 그 후 함평 이씨 집안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이 연달아 쏟아졌다는 것을 차석만은 기억했다.

“시아버님의 묘를 이장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언제 짬을 내 가보지요. 그 지역엔 명당이 많거든요.”

“전 다른 곳으로 이장하려 했는데요.”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요. 여담이지만 그 지방에 관한 거니 들어주십시오. 양양이라면 송강(松江 ; 정철의 호)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관찰사로 나갔을 때 남대천에서 바람을 쏘인 적이 있었답니다.”

송강은 무산 12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곳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것을 감지했다. 그는 무산 12봉에 쇠말뚝을 박고 소금 독을 묻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때부터 양양에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크고 작은 변괴는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덧붙였다.

얘기가 끝나자 여인은 상담 비용으로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십만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주 토요일이었다. 7시가 거의 되었을 무렵 야릿야릿한 목소리의 여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