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창건 후 완성된 대장경 판에 목인(해인)을 감춰 둔 채 세월은 더없이 흘렀다. 대원군이 아직은 흥선군(興宣君)으로 외척의 세력에 눌려 난봉꾼 흉내를 내고 있을 때. 정만인(鄭萬人)이란 속명(俗名)을 가진 점쟁이가 찾아와 비단으로 싼 첩지를 놓고 물러갔다.

“다른 사람이 보아선 살아남지 못합니다. 나으리 혼자 보십시오.”

흥선은 우습게 생각했다. 정만인이 떠나고 난 뒤 비단을 풀었다. 거기엔 계해년(癸亥年) 11월 13일에 흥선의 아들이 임금이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점괘는 놀랍도록 적중했다. 정만인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상갓집 개로 홀대받던 흥선이 대원군이 되었을 때 그 점쟁이가 홀연히 나타났다.

“대원위 대감,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으면 합니다.”

대원군은 즉시 해인사 주지에게 관문(關文 ; 상관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문서)을 내려 정만인에게 팔만대장경을 인출 · 감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어느날 대원군이 종친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문득 청나라 술사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술사는 그런 말을 했었다.

“대감께서 갑자(甲子) 이전에 살만인(殺萬人) 하셔야 부귀와 영화가 가득할 겁니다.”

대원군은 권세를 잡은 후 좀처럼 만 명을 죽일 기회가 없었다. 천주교라는 서교(西敎)가 퍼지는 것을 보며 좌포장(左捕將) 이경하(李景夏)로 하여금 그들을 잡아 죽이게 했다. 수구문 밖에 쌓인 시체가 성보다 높아지고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시체는 얼마 안 가서 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살만인’이란 뜻이 만 명을 죽이라는 게 아니라 갑자년 이전에 정만인(鄭萬人)이라는 술사를 나타날 것이니 죽이라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급히 사람을 풀어 정만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그는 해인사에서 대장경 몇 질을 인출한 후 해인(海印 ; 목인)을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풍운뇌정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목인. 그것이 정만인과 함께 사라져 버렸으니 그 후의 일은  해인을 준 용왕만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얘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용왕의 도장’이란 타이틀 안에 위의 얘기들을 간단히 다뤄 주고 정만인이 찾아오는 것으로 스토리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신기막측한 해인을 마대령님이 모시는 어른께서 찾아낸다는 것도 괜찮고요.”

마충길은 난색을 표명했다.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용왕의 도장’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우연히 얻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잖은가? 섣불리 다뤘다간 오히려 격이 떨어질 수도 있겠는데 어떻소, 이부장 생각은?”

“그런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만약 제가 이 부분을 건드린다면, ‘용왕의 도장’을 선친의 묏자리나 신통력 있는 점쟁이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이어가도 무리가 없을 듯싶습니다. 일단은 제가 시놉시스를 만든 후 마대령님이 결정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럽시다.”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명단에 ｢한국부동산컨설팅｣의 장민호 회장 이름이 올라와 있던데요.”

“아, 장회장 그 사람. 너구리 중의 상 너구리요. 세상살이에 닳을 대로 닳았으니 물속으로 백리를 달릴 수 있다지 않소. 그만큼 술수가 뛰어나답니다. 전국에 그 사람 소유의 부동산이 엄청나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면 다 알죠.”

‘세상 사람이면 다 안다’는 것은 왜정 시대 매국을 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완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전기응이나 장민호처럼 머리만 보이는 쪽도 있다. 그러다 보니 한결 다루기가 어렵다. 그것은 지은 죄를 다스리지 않은 위정자 쪽에 책임이 있었다.

“그 동안 여러 채널로 그 자의 비리를 내사해 왔지만 포착된 게 없어요. 물론 의심이 가는 구석은 많지만. 심증만으로 건드렸다간 걷잡지 못할 소용돌이에 휩쓸릴 공산이 커요. 분명 그 자의 숨통을 죌 올가미가 있을 것인데….”

마충길이 매력을 느낀 것은 장민호가 전국적으로 보유한 부동산이었다. 그것은 뻑뻑거리며 어렵사리 돌아가는 ‘거사’라는 원동기를 쉽게 돌릴 수 있는 윤활유였다.

“제가 한 번 손을 대보죠.”

이동박이 검지 끝으로 장민호의 이름을 톡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