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대령님이 모시는 분이 불교 신자라 들었습니다. ‘용왕의 도장’은 해인사(海印寺) 창건과 관계가 깊으니 도움이 될 거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용왕의 도장’은….”

이동박은 머릿속에 너울거리는 옛 얘기들을 꺼내들었다.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에 있는 사찰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죠. 그곳은 팔만대장경 판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로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李貞)이라는 이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승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여러 해 뒤 귀국해 해인사 창건에 착수했다. 소식을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했는데 비용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전설’이 역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전. 경상도 합천에 유생(儒生)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심성이 맑았지만 살림살이는 너무 궁핍했던 모양입니다.”

유생의 사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답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입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유생은 세월아 가거라 경서(經書)만을 읽어 댔다. 선친 때부터 데리고 있던 노복들이 궂은 품일을 해 온 덕에 겨우 추위와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해 여름, 툇마루에 앉아 하늘 멀리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송아지 만한 누렁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집안으로 들어왔다. 살랑살랑 꼬리를 치던  누렁이는 자꾸만 유생에게 업히라고 졸라댔다.

유생이 등에 업히자 누렁이는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더니 강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누렁이는 한 번 깡충 뛰어오르더니 물속 깊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희미한 안개가 피어오른 물속은 한 치 앞을 분간치 못할 정도로 하얀 기류에 덮여 있었다. 물속인데도 숨 쉬는 데에 전연 이상이 없었다.

이윽고 허연 기류가 사라지고 산호며 해조류가 나타났다. 온갖 고기들이 유연히 헤엄쳐 가는 게 보였는데 그곳에서 조금 더 가자 용궁이 나타났다. 유생이 개 등에서 내리자 아리따운 궁녀가 용왕 앞으로 안내했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환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선생을 모셔 온 것은 태자의 학문이 부족 해섭니다. 마땅히 좋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날부터 태자는 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서삼경]을 마치자 태자가 말했다.

“스승님, 내일이면 스승님께서 집으로 돌아가십니다. 부왕이 기념될 만한 물건을 주겠다 하시면 다른 것은 그만 두고 목인(木印)을 달라 하십시오.”

다음날 환송연이 열렸다. 용왕은 유생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주시려거든···, 목인을···, 주십시오.”

용왕은 흔쾌히 목인을 하사하고 진귀한 보석들을 유생에게 싸 주었다. 태자의 전송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월은 이미 20년이 지나간 후였고, 집 떠날 때 보았던 갓난아이는 어느새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용궁에서 가지고 온 보석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구휼에 나선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소승의 이름은 순응이라 합니다.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연히 선비 님의 활민(活民)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용왕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오호, 그래요? 용궁에 가셨다면 불가사의한 목인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까?”

“글쎄요. 그게 신비로운 것인지 모르지만 용왕에게 그런 물건을 받아 왔습니다.”

“그걸 볼 수 있을까요.”

유생이 건넨 목인을 받아 든 스님은 종이에 ‘금 10냥’이라 쓰고 쿡 찍었다. 그런 다음 반듯하게 사각으로 접어 불을 붙이더니 공중으로 던졌다. 종이 조각은 불길을 피우며 너울너울 춤을 추더니 눈 깜짝할 순간 열 덩이의 금(金)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님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선비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활민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개중에는 그것을 믿고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소승의 생각은 만백성을 구제하는데 이 목인을 사용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용왕의 선물을 함부로 쓰는 것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유생은 선뜻 목인을 내놓았다. 이후 해인사 창건에 박차를 가하던 순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린 바람에 그 뒤를 이정이 이어받았다.

해인사 창건에 나섰던 순응은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이다. 그가 ‘해인사’라 이름 지었던 것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 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해인사에는 고려시대 새긴 불교의 경전이 있다. 이름하여 ｢해인사 대장경｣이다. 국보 32호인 이 대장경은 초조 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에 몽고 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자, 당시 집권자인 최우 등을 중심으로 대장 도감을 설치해 16년 만에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