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고려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나오는 여러 가지 화소(話素)들과 민속적 요소의 차용은 ｢용비어천가｣도 마찬가집니다. 분명한 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작제건설화(作帝建說話) 등은 글자 그대로 신화 시대의 소산물이지만, ｢용비어천가｣는 역사 시댑니다. 그러다 보니 상고 시대의 비현실적인 신성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런 이유로 신화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신이성’은 ‘하늘(天)’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통해 극소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시우가 만든 ｢신 용비어천가｣의 시놉시스는, 상고 시대의 초월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성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충길은 감탄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신 용비어천가｣의 시놉시스엔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다분했다. 뭔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이제야 실체를 드러낸 것을 높이 평가했다.

“참으로 대단해. 어떻게 정외과 출신이 한국사에 정통한지 모르겠어. 비결이 뭔가?”

“과찬이십니다.”

“사안을 보는 눈이 남달라. 우리 쪽에서 ｢신 용비어천가｣를 구상하고 있다는 걸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의미? 의미만 가지곤 안되지. 확실한 쇼크를 줘야 하니까.”

“그건 무리라고 봅니다. 지금 항간의 소문은 여러 갈랩니다. 그것을 어떻게 유화시키는냐가 중요하죠. <뉴스21>이라는 야당의 기관지엔 군부의 움직임을 야합(野合)이라 평했더군요. 심하게 말해 ‘이리들의 야회(夜會)’라는 거죠. 군부가 어느새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됐다는 겁니다.”

민사장이 양념을 쳤다.

“겁대가리가 없구먼.”

“그 글을 읽고 전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근자에 일본인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입니다. 전임 취재부장 박부장의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특별한 게 눈에 띄더라구요. 남악(南岳)이란 거였죠.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얘깁니다만, 서울엔 북악이 있고 전라도엔 남악이 있다는 거죠. 그 남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메모지를 보면서 우리네 식자(識字)들이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12.12라는 특별한 상황 하에 일본인들의 입국이 군부와 야합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 것은 무리한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신 용비어천가｣를 구상하는 것은 당연하게 설명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만약 마대령님 쪽에서 방송을 장악한다면 몇몇 프로의 개편을 단행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프로 개편, 어떤 식인가?”

“지난 10.26 사건 이후 민중들은 긴장해 있습니다. 18년 군정으로 민주 인사들의 발엔 족쇄가 채워졌어요. 할 말을 못하고 살아온 식자들은 머지않아 ‘서울의 봄’을 외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또다른 형태의 혼란이 야기될 게 뻔하죠. 그것을  막으려면 민중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프로 개편인가?”

“그렇습니다. 신문 쪽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활자 매체는 직접 공략해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잖아요. 당연히 방송에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음, 인기를 얻고 있는 여름 특집극의 재구성입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와 같은 인기 드라마를 리메이크하여 다른 이름으로 내놓는 겁니다. ｢전설을 찾아서｣나 ｢전설과 야사｣라고나 할까요. 내용은, 새롭고 강력한 정부의 탄생을 강조해야 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죠. 같은 생활권에 있는 중국의 유명한 판관(判官)들의 얘길 다룬 드라마를 수입한다거나, 또는….”

“그러니까···, 우민 정책(愚民政策)을 쓰자는 거구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취지에서는요.”

“참고하겠네.”

마충길은 넌지시 이동박의 의중을 파고들었다.

“이부장 말을 들으니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반갑소. 내 윗전에 이부장의 말을 하리다. 음, 그것 말고 내게 하고 싶은 얘긴 없습니까? 무슨 얘기든.”

“조금 전 ｢신 용비어천가｣의 시놉시스를 보다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용비어천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방송물로 만들려면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죠. 아무래도 언론계를 완전히 장악했을 때 방영해야 역효과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겠지요.”

“일리 있는 말이오. 그렇다면 뭐가 좋겠소?”

“제 생각엔 ‘해인(海印)’을 다루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해인?”

“‘용왕의 도장’이죠.”

“자세히 설명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