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게 마대령. 그런 일을 하자면 자료 정리라는 게 필요할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이 알아서 득 될 게 없구.”
“아, 걱정 마십시오. 사무실은 얻어 놨습니다. 저기 동대문 스케이트장 옆에 대한 ‘오피스텔’이 있어요. 마침 720호와 721호가 비어 있어 계약해 뒀습니다. 필요한 집기며 사무기기를 비치해 두었으니 몸만 들어가면 됩니다. 오피스텔 관리실에 가서 내말하면 키를 줄 겁니다.”
마충길은 또 하나의 봉투도 내놓았다.
“우선 천만원 담았습니다. 일을 하시다가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 안에 핫라인 넘버가 있습니다.”
민사장은 봉투를 서랍 속에 갈무리하고 나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야 마충길의 솔깃한 제안에 다른 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으나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마대령, 내가 사장이라지만 일을 하는 건 취재부네. 그들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건 내 소관이나, 그런 일을 내가 직접 뛰어다닐수는 없잖은가. 어차피 ｢스캔들｣ 잡지에 실리는 기사는 취재부에서 올라와야잖아. 이왕 온 김에 이부장을 만나 보게.”
“이부장?”
“우리 회사 취재부장이야. 그 친구 정외과 출신이야. 보기완 달리 심지가 깊고 허점이 보이지 않아. 우리 쪽에서 데리고 있을려면 한 번쯤 면담 형식을 취하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
“언제 선배님한테 왔습니까?”
“한 일주일 됐지.”
“예에? 일 주일을 겪어 보고 속내를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좀 무린대요.”
“쯧쯧쯧, 이 사람 소심하긴. 하루면 어떻고 일주일이면 어때. 우리 여편네는 2십여 년을 함께 지냈어도 그 속을 모르겠더구만. 이런 말 있잖은가. 떠나는 사람을 문밖에 나가 손을 흔드는 것이나 십 리를 전송하고 헤어지는 것이나 이별은 이별이라는 말. 사람을 알아보는 데 몇 달 몇 년이 무슨 필요 있는가.”
“그전에 근무한 직장은 어딥니까?”
“주간지네.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봐도 충분해. 쓸데없이 시간 죽이지 말고 한 번 만나 봐. 내가 손해날 일 권하지 않으니까.”
“좋습니다.”
민사장이 인터폰을 누르자 유상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부장 좀 들어오라고 해.”
유상희의 짧은 대답이 그치고 이동박이 들어왔다. 그는 소파 한쪽에 무릎을 세운 꼿꼿한 자세를 취했다. 마충길이 몇 번이나 편히 앉으라고 했지만 끝내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저기 말이야 이부장.”
“예에, 사장님.”
“이참에 나라에서 하는 일 좀 도와줘야겠어. 마대령이 사무실도 마련해 놨다니까 특별히 준비할 건 없고. 하긴 마음의 준비라도 있어야겄지. 출근은 하되 저쪽 사무실은 특집부 형태로 상주 인원을 두는 게 좋겠어. 그래야 이 쪽 저 쪽으로 연락을 취하고 받을 게 아닌가.”
“제가 협조해야 할 일이 뭔지를 알아야 마음 결정이라도 할 게 아닙니까.”
“그렇지. 내 깜빡했구만. 그러니까 어떤 일이냐 하면.”
민사장이 요점을 짧게 끊어 말하자 이제까지 연예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스타일을 바꿔 큰 덩어리로 한탕을 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자네야 능력 있는 사람이니 혹시 알아. 우리 마대령이 자네를 요직에 중임시킬지.”
“별말씀 다 하십니다.”
“아니야, 마대령 이 친구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누구처럼 뻥만 까진 않는다구. 그런 줄 알고 소신껏 밀어보자구.”
“알겠습니다, 사장님.”
“기사는 말이야, 취재도 곁들이겠지만 가능한 마대령이 보내는 걸 위주로 작성해야 돼. 그래야 단번에 엮을 게 아닌가. 그런 줄 알고 나가 보게. 가만,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자네 팀 민소라를그곳에 상주시키는 게 좋겠어.”
“것두 한 방법입니다. 한 가지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사장님이 아니라 마대령님껩니다.”
마충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신 용비어천가｣를 만드신단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부장께선 관심 있으시오?”
마충길이 건네준 ｢신 용비어천가｣의 시놉시스를 몇 번이나 들춰보고 나서 사안의 중대성을 짚어 나갔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조 세종대왕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십니다. 이것을 지은 목적은 임금이 된다는 건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과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후대의 임금은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경계하려는 데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종합적으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동박은 메모 한 장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저런 사실(史實)을 물 흐르듯 펼쳐 냈다. 그것은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머리의 글은 여섯 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은 것이고, 끄트머리 글은 우리말로 되어 있는 시에 한문 시가를 달아 풀어낸 내용이다. 권제 · 정인지 · 안지가 1447년에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리자 세종이 기뻐하며 ｢용비어천가｣라는 이름을 내린 점도 덧붙였다.
“이 노래를 보면 그렇습니다. 제1장은 해동 여섯 용이 내려와 일마다 복을 주시니 옛성인들의 고사와 부합된다는 거죠. 이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서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제2장은 모든 일은 그렇게 될 만한 까닭이 있다는 겁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처음엔 날건달로 여겼던 이동박의 입에서 구구절절 흘러나오는 옛 시가에 대한 풀이는 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그런가 하면 제3장에서 8장까지는 조선 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한아비들의 행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이미 하늘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제9장에서 14장까지는 이태조의 위화도 회군에서 한양 천도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위화도 회군으로 민심이 이태조에게 쏠렸으나, 태조께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다. 그런데도 여러 사정이 생겨나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텁니다. 이씨가 왕이 될 여러 정황은 비기나 참서 등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들은 고려 왕조 초기부터 조짐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것이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대에 이르러 표면화됐죠. 그런가 하면 태조 이성계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이 도와준 신기한 기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 이 부분이 주요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조금 전에 보았던 시놉시스는 ｢신 용비어천가｣의 신성(神聖)을 어느 한 곳에 두지 않고 그때마다 우연 발생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용비어천가｣는 모든 신성을 하늘(天)에 두었습니다. 신화시대의 신화에서 ‘신이성’을 제거하고 ‘신성성’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사 시대의 합리적인 신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동박의 예리한 지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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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