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여기 계셨어요?”

“미스 유가 웬일이야?”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동문이라던데요. 마충길씨라는….”

민사장은 혼비백산하여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음식값은 이동박이 지불했다. 그는 미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앞서 걷는 유상희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봐요 미스유, 미스 문과 커피 한잔하고 갈 겁니다.”

“네에, 그렇게 하세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동박은 커피숍을 향해 돌아섰다. 약간 무시하는 듯한 행동에 불씨 같은 작은 분노가 유상희의 마음 깊숙이에 화약을 터뜨리며 올라왔다. 그러잖아도 박부장이 물갈이 당했다는 말을 들은 터여서 그에 대한 미움은 한겹 더 쌓인 셈이다.

보통 때라면 만만치 않은 추위 때문에 난로 옆에 옹기종기 앉아 농담을 알밤처럼 구워 먹을 상태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취재부든 편집부든 이동박과 민소라를 제외하곤 모두 외출이었다. 나가 봐야 건너편 다방이나 새로 생긴 커피숍에서 뜨끈한 엽차나 축 내겠지만.

민사장은 혹시 ｢만담춘추｣에 실린 글 때문에 왔는가 싶어 바짝 쫄았다. 그러나 유자차를 마시며 한 가닥 두 가닥 실타래처럼 풀려 가는 마충길의 얘기를 들으며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나눈 얘기는 모두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만약 이런 저런 말들이 새어나가면 선배님이나 저나 좋을 일 하나도 없습니다. 아시겠지요.”

“이를 말인가. 나를 찾아온 용건부터 말해 보게.”

“10.26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더구나 12.12를 하극상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가하면 우리를 좋게 여기는 쪽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 적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선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요. 아무리 좋은 사상을 갖더라도 우리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잖음 우리가 죽어요. 그래서 선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거면 빨리 말해 보소. 자네 청을 거절하겠는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군정(軍政)이 종식되는 걸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나 학생들 의식이 똑바로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민주주의다 뭐다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죠. 더구나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연일 계속되는 데모는 빨갱이들이 섞이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허약한 정부로선 감당하기 어렵죠. 강력한 정부, 파워 있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부의 힘이 필요해요.”

“그거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어쨌든 이번 거사에 참여한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자 나서는 게 아닌가?”

“꼭 정권을 잡자는 건 아닙니다.”

“돌려 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지.”

“정치를 하자면 무엇보다 자금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자금이 필요해요. 이제 와서 기업체들 상대로 홍보 전략을 짜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래서….”

“어허, 이 사람 되게 빼는구만. 후딱 얘길 하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야망이 큽니다. 그분께서 큰 자리에 앉지 못하신다면 상당한 혼란이 올 겁니다. 그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분은 빈 의자에 앉으셔야 합니다.”

‘빈 의자?’

민사장은 내심 자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 의자란 권력의 가장 높은 자리를 뜻하는 듯싶었다.

“좀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자금이 확보되어야 하고, 빈 의자에 앉을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박대통령처럼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의자에 앉기 위해선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해요. 그 명분이 10.26입니다. 10.26 사건을 통해 나라를 위태롭게 한 무리들을 잡아들이거나 조사중에 있습니다만, 요는 그 명분 뒤에 따르는 또하나의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마충길은 육원각 밀실에서 만난 주식회사 무극의 자금 담당 상무 김시우의 말을 들려주었다. 한동안의 설명을 마치고 나서,

“어떻습니까 선배님. 김상무 얘기론 ｢신 용비어천가(新龍飛御天歌)｣를 짓자는 건데요.”

“그러니까 제왕의 등극을 나타내는 용비어천가를 새롭게 짓자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작업은 어느 정돈가?”

“시놉시스가 나왔으니 금명간 제작해야지요.”

“거기까지 갔다면 일이 다 됐네.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은 뭔가?”

“이겁니다.”

마충길은 흰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 안엔 스무 개 남짓의 명단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기업체를 비롯하여 특별한 종교단체 그리고 전직 장관 등, 고위직 공무원도 눈에 띄었다.

“여기 있는 명단은 여야(與野)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정 축재자는 결코 아닙니다. 그 자들은 공식적으로 철퇴를 내릴 거니까요. 여기에 적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은 재화나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뺐자는 건가?”

“뺐는 게 아니라 내놓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묻진 않았지만 민사장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배님께선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죽은 정보가 아닌 살아 있는 정보. 즉 움직이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건 인력(人力)이죠. 인력만 있으면 필요에 따라 아주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하고 만들 수도 있어요. 물론 부족한 정보는 저희가 제공하겠습니다만.”

“우리 쪽에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스캔들｣입니다.”

“스캔들?”

“어떤 식의 작업도 좋습니다. 도청을 하든 어쩌든 선배님이 나서십시오. 우린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선배님이 ｢스캔들｣ 잡지에 문제를 제기하면 실마리는 우리가 풀겠습니다. 이번 일만 도와주시면 장관 자리 하나 쯤 따 놓은 당상 아닙니까.”

“이 사람아 아무나 장관 하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싫은 낯빛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