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죽음의 닻

목인(木印)

“여러분들의 간절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이제껏 기다려 왔지만서두 박부장한테 일언반구 연락이 없었다는 건 여러분도 알 겁니다. 에, 우리 잡지사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공익을 앞세워 절실한 사명감으로 취재부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팀장의 영입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말이 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민사장은 새로 채용한 두 사람을 소개하기 전 그렇게 말했다. 취재부장 이동박(李凍博 ; 30세)과 민소라(閔素羅)였다. 이동박은 약식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동박입니다. 워낙 집안이 어려워 언땅 위에 거적데기를 깔고 나를 낳았다고 ‘동박’이라 지었답니다. 좋은 인연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옆에 있는 민소라 씨완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파트넙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 바랍니다.”

대부분 첫소개를 할 때엔  도움을 바란다거나 앞으로 무슨 일을 부탁한다는 게 ‘틀’이다. 그런데 첫출근한 직장에서의 인사말이 ‘언땅에서 태어났다’느니 거드름을 피우듯 ‘협조를 바란다’는 건 아무래도 시건방진 느낌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일을 달금지게 보낸 느긋한 여유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어붙은 피아노 줄처럼 팽팽해졌다. 수습기자를 벗어난 취재부의 정문호(鄭汶浩)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민사장의 훈시가 이어졌다.

“예나 제나 기미년(己未年)은 참으로 슬픈 햅니다. 유관순 누나를 생각나게 하는 그 옛날의 기미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 받고 쓰러져 갈 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 옛날의 기미년이나, 10.26이다 12.12다 요란뻑적스러운 올해의 기미년은 어쩌면 한결같이 슬픈 핸지 모르겄습니다. 슬프디 슬픈 이야기들이 역사의 저쪽으로 시냇물 마냥 졸졸졸 흘러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사흘만 지나면 올해의 기미년은 쫑입니다. 남아 있는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전에 묵은 것을 깨끗이 정리해야 겄습니다. 특히 광고비 미수금은 해를 넘기지 말고 입금시킵시다.”

모두들 듣는 둥 마는둥 딴전을 피우는데도 민사장은 뱃살에 힘을 주며 혓바람을 날렸다.

“에, 새롭게 맞이하는 1980년은 그 이름도 찬란한 경신년(庚申年)입니다. 원숭이 해죠. 새해엔 기름 좔좔 흐르는 건수를 만들어 북 치고 장구 치고 나팔을 불며 잔치판을 열어 봅시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태산이지만 이상으로 마치겄습니다.”

얘기를 끝내고 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었다. 지난밤 늦도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원숭이에게 재주가 많다는 건 ‘훔치는 기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원숭이의 재주를 써먹으려 했던 것은 ‘쪼찡’으로 회사를 살리자는 캠페인 아닌 캠페인을 일으키려는 의도였다. 약점이 있는 회사나 개인을 찾아가 약점 대신 좋은 기사를 써 주고 그에 상당하는 잡지를 구입하게 하는 상술이 속칭 ‘쪼찡’이었다.

이날 이동박과 민소라를 한식집으로 데려간 민사장은 도가니탕으로 점심을 때우며 충고라는 것을 던졌다.

“어느 직장이나 나름대로 룰이 있겄지만 이부장 역시 내가 만든 룰을 지켜 주기 바라요. 에, 그것은 회사에서 회식을 하기 전엔 직원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말라는 거요. 직원들이 술을 먹으면서 하는 말은 사장을 씹는 것밖에 더 하겄는가. 요즘은 어떤 놈이 내 말을 하는지 귀가 간지러워 잠을 잘 수 없다니까.”

“그런 염련 안하셔도 됩니다.”

“좋아, 좋아. 그러니까 이부장을 스카웃 한 거지.”

민사장은 반주로 따른 술을 홀짝 마시더니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참, 이부장 별명이 뭐요?”

“하이에납니다.”

“하이에나?”

“사람들은 하이에나가 죽은 고기만 먹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산 고기도 잘 먹습니다.”

“산 고기든 죽은 고기든 체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면 좋지.”

민소라가 쿡쿡쿡 웃어댔다. 민사장은 굳이 그걸 모른 체 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어이, 이부장. 자네 ‘마명삼조(馬鳴三組)’란 소리 들어봤는가?”

“갑자기 마명삼조는 왜요.”

“글쎄 알어, 몰러?”

“그것 모르면 간첩이죠. 3마씨(三馬氏) 아닙니까. 마충길 · 마상섭 · 그리고 또 마 뭐더라….”

“마순호지. 한데 말이여, 3김씨 했을 땐 몰랐는데 3마씨 하니까 좀 이상한데?”

민사장은 종달새처럼 후루루 눈웃음 치고 나서,

“사실은 내 후배 중 한 명이 3마씨거든. 마충길이라고.”

이동박의 눈이 치뜨였다.

“한달 전 동문회를 했잖은가. 예전에는 그렇게 나오라 해도 콧배기 한 번 보이지 않던 친구가 웬일로 정장 하고 나왔더라니까. 근데 변했어. 예전의 마충길이 아니야. 1차야 동문 회비에서 내닌까 별거 아니지만 룸살롱으로 2차를 갔는데 그날 술값 옴팍 뒤집어썼거든. 농담도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 아무리 사람이 변한다지만 속까지 까꾸로 뒤집어졌더라구. 하여튼 간에 실세라는 걸 실감할 수 있드만.”

집으로 돌아온 민사장은 곰곰 생각해 봤다. 아무리 실세라지만 마충길은 현역 군인이다. 군인의 몸으로 수십 명의 술값을 지불했다는 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게 어디 한두 푼인가. 쓸데없는 객기가 발동했다. 동문 회지의 ｢만담춘추(漫談春秋)｣ 란에 한편의 글을 올렸다. 제목은 ‘천리마의 소원’이었다.

<한나라에서 제일 가는 말을 국마(國馬)라 한다. 그런 말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 동작이 곧게 갈 때엔 먹줄에 맞고 돌아갈 때엔 갈고리(鉤)에 맞으며 꺾어 갈 땐 곡척(曲尺 ; 正方器)에 맞는다. 그리고 뚜렷이 돌 때엔 그림쇠(正圓器)에 맞는다.>

그런가 하면 중간의 인용문은 한퇴지(韓退之)의 ｢잡설(雜說)｣이란 글에서 슬쩍 훔쳐 왔다.

<세상에는 말을 잘 알아보는 백락(伯樂)과 같은 현명한 이가 있음으로 천리마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한다. 천리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그 말을 알아보는 백락은 언제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천리마가 있다 해도 종놈들의 몽둥이에 학대를 받아 마굿간에서 죽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도 인정받지 못하고 허접스럽게 죽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결론 부분에서는,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부릴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방법을 써야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 그렇지 못한다. 말을 기르는 데는 충분히 먹이를 주어 재능을 드러나게 해야 되는데 그렇지도 못한다. 그런가 하면 말이 자기의 고통을 호소해도 그 뜻을 알아주지 못한다. 무언가 호소할 때마다 괜히 채찍만 휘두르며 쓸데없이 중얼거리기를 ‘이 세상엔 천리마가 없단 말이야’ 한다.>

여기저기서 따온 글이었지만 그런 대로 구색이 갖춰진 모양이었다. 회지를 읽은 몇몇 동문들은 3마씨를 은근히 비꼰 ｢만담춘추｣에 희희낙락 박수를 보냈다. 처음엔 같이 웃고 즐기느라 몰랐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괜한 일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뜨뜻한 방바닥의 온기 때문에 일어설까 말까 미적거리고 있을 때 유상희가 음식점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