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상하잖소.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신도 교도들에게 경전이 필요할 이유가 없질 않는가. 또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저희들 손으로 만들어야지 왜 우리에게 경전을 만들라는 것인가. 이건 옳지 못한 일이오.”

일행들은 공감했다. 그들은 염소수염의 어떤 회유가 있더라도 협조하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을 굳혔다. 이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발상이었다. 다음날부터 염소수염의 회유가 시작되었다.

“어차피 조선은 망한 나라요. 여러분들이 어떻게 나오든지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공연히 힘 빼지 말고 경전 작업에 참여하시오. 그것이 여러분 가족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겠소!”

그들이 쉽게 응하지 않았으나 전연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어이구 이걸 어찌합니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될 때엔 제 마음까지 불편합니다. 지난밤 오죽 선생의 집 별당에 불이 나는 바람에 부인께서 놀라신 모양입니다. 따님과 함께 있었지요.”

윤사달은 반신반의했다. 뚜렷이 연락할 방법이 없고 보니 잔걱정으로 혀끝이 탔다. 사건 · 사고는 하루가 멀다 않고 일어났다. 어느 날에는 허련의 딸이 실종되는가 하면 이틀 후엔 김창원의 부친이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이윽고 열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염소수염은 한사람씩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길들여진 망아지처럼 정확히 돌아왔다. 물론 자기 스스로 온 게 아니고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두 눈을 가린 채 군용 트럭을 타고 돌아왔다. 마지막 차례가 윤사달이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참으로 즐겁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사흘 후엔 돌아와야 합니다.”

윤사달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은 당시엔 진역관(眞易館)이란 현판이 없었다. 스물여덟 계단을 오르면 대문 오른쪽에 깃발이 꽂혀 있고 하얀 옥양목 천에는 붉고 굵게 만(卍) 자 표시가 있었다.

“당신이 잘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소만, 별당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큰일 뻔했습니다만 별 일은 없었습니다.”

본래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화재 얘기를 꺼냈을 때 낯빛이 변한 것으로 보면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너무 걱정 말아요. 무슨 방도가 있을 거요. 함께 있는 사람들이 한 번씩 외출 했는데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반드시 꿍꿍이가 있을 듯싶소. 그러니 문밖출입을 할 땐 조심하시오.”

윤사달은 벽장 속으로 들어가 낡은 가방을 가져왔다. 거기엔 이 집을 구입했던  사숙(師叔)이 남긴 기록이 있었다. 자전(自傳) 형식으로 쓴 집안 내력이었다.

<내가 오래 전 뒤꼍에 오죽(烏竹)을 심고 사달의 호를 그리 정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아마 일곱 해 전이었을 것이다. 조선 산천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경상북도 안동 땅 임청각(臨淸閣)에 가게 되었다. 가상으로 보니 집안 구조는 영락없이 해(日)와 달(月)이 합해진 용(用 ; 해와 달이 합해지는 것은 풍수법상 明이라 하지 않는다) 자 형태였다.

집안을 한 바퀴 휘둘러보니 과연 명당임이 분명했다. 용 자 형태의 가상은 동쪽에서 보면 두 개의 동문(東門)과 네 귀가 반듯한 안뜰에 배치하여 용 자를 만든다. 그 사이사이에 삼정승을 낳으리라는 삼상산실(三相産室)과 장수를 바라는 불사간(不死間), 도둑을 막는 퇴도문(退盜門)을 두었다.>

사숙이 남긴 서찰의 말미엔 이 집이 오래 전에 특별한 구조로 바뀌었음도 설명했다.

<이 집은 일월이 상접하니 남녀가 신복(神卜)이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 열두 간 숙소를 지어 오죽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숲속에 만든 밀실을 숨기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내가 조카님에게 오죽(烏竹)이란 아호를 지어 준 것도 그만한 뜻이 있어서였다. 이제 조카님은 그곳으로 들어가 내가 완성치 못한 부분들을 이루기 바라네.>

윤사달은 숲으로 달려갔다. 밀실에서 사흘을 지내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떠나기에 앞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인, 머지않은 장래 인연 있는 자가 우리 집을 찾아올 것이오. 그가 누구인지 부인께서 알 필요가 없소.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니.”

윤사달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심한 고통이 몰아친 것이다. 개미가 물어뜯는 듯한 스멀거림과 가려움증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함께 10여 분 동안 이어졌다. 그제야 염소수염이 왜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둔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왔을 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이제껏 미소로서 대하던 오까모도라는 염소수염의 낯빛에 살기가 너울거렸다.

“지금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어. 도대체 그 와룡패라는 것이 뭐야? 어떻게 생긴 건가? 자네들이 만든 세 번째 비결에도 그런 말이 있었잖은가? 그런데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모두들 발가벗긴 채 몇 번이나 조사를 받았다. 윤사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뒤지고 볶아도 와룡패가 나타나지 않자 염소수염은 아랫것들의 보고를 믿는 눈치였다.

“그것은 상징적일 겁니다. 조선 사람들은 그런 얘기들을 좋아하잖습니까. 절 하나를 짓는데도 용왕이 주었다는 해인(海印)이라는 신비로운 도장 얘기를 이렇게 저렇게 접목시킨 후 해인사(海印寺)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신비감을 불러올 수 있잖습니까. 그게 조선 사람들의 특징인 듯싶습니다.”

소란은 일단 그것으로 끝났다. 볼모 잡힌 일행들이 경전을 짓든 놀든,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두 해가 지나가는 동안 외출은 1년에 한 번이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어떤 결과가 따르지 않을 때엔 가차 없이 고통을 주었다. 그것은 먼 훗날 약명이 ‘K-2’로 밝혀진 독극물이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벽암은 말을 끊었다. 도무지 지난 세월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아련하고 덧없었다. 스승이 남긴 오죽헌의 비밀을 깨뜨리지 못하고 우연히 자신의 집을 찾아든 박일우가 알아냈다는 것이 씁쓸한 여운을 뿌렸다.

“내가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독극물에 관한 것이오. 오죽 스승님을 비롯하여 귀암이나 고암 선생이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모두 독물 때문이라 하셨답니다. 이 독물에 대해 사모님께 들었거든요.”

윤사달이 집을 떠나기 전 그런 얘기를 했었다. 자신은 충분히 해독시킬 비방이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 했다. 독극물에 대한 처방은 ‘이종준의 단방’이면 감기 몸살에 침 한방 꽂듯 해결할 수 있다고 농담했다. 그의 부인은 그 얘기를 훗날 벽암에게 들려주었다.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던 송학수의 낯빛이 무거웠다.

“귀암 스승님이 어디 계신 질 알고 있지만 함부로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탁기자와 순옥이가 토굴에 갇혔다니 그 또한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고…. 어허,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될지 모르겠소이다.”

“이건 내 생각이오만.”

벽암이 침묵을 깼다.

“얼마 전 [격암유록]이란 책자를 보았더니 그 내용이 1930년에서부터 지난 77년 이전까지 일어났던 사건 · 사고로 짜여졌음을 알았네. 이미 발표된 [격암유록] 외에 또 다른 책자가 준비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란 걸세. 앞으로는 파자나 주역만이 아니라 컴퓨터나 우주여행 등의 첨단 과학에까지 손을 미칠 게 뻔해요. 그렇게 본다면 그 방면의 석학들 역시 언제 어떤 식으로 실종되어 저들의 꼭두각시가 될지 알 수 없잖은가.”

“당연한 말씀이오.”

송길주 역시 공감하며 송학수 쪽으로 시선을 뿌렸다. 그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암유록]이 예언서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 사고를 기록해 놓은 거라면, 분명 제2, 제3의 예언서를 만들기 위해 신도교 무리들은 납치를 감행할 것이네. 그러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게 어떻겠소?”

송학수는 무조건 찬성이었다.

“나는 벽암의 계획을 따르겠소.”

“[격암가장결]이란 이름하에 내놓았던 세 번째 비결을 이용합시다. 즉,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신의 능력을 구사하는 성인이 내려와 마귀를 죽이고 그 종자들의 씨를 말린다!’ 다시 말해 와룡패를 지닌 성인이 신년에 나타난다는 광고를 내세. 광고가 나가면 신도교에서 무슨 반응이 있을 게 아닌가.”

송학수가 손뼉을 쳤다.

“좋은 생각이오.”

“만약 군부가 광고를 막는다면 신문 사이에 집어넣는 간지(間紙)를 이용합시다.”

의견의 일치를 보이자 세 사람은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문득 시선을 돌린 창밖에는 소담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게 한결 포근했다. 점점이 떨어져 내리며 하늘거리는 눈송이. 크리스마스 캐럴 송은 눈발 사이를 비집으며 바람을 타고 있었다.

<제1부 마인(魔人)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