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풀어 거사를 찾았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찾지를 못했다. 소문엔 동주의 발삽사에 창근이가 말한 거사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찾아가 보니 과연 그 사람의 화상이었다. 궁예는 점복에 능한 신하들을 불러 거울에 나타난 글귀의 뜻을 헤아리게 하자 송함흥이 대표로 아뢨다.

“하나님이 진마에 아들을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말합니다. 뱀해에 두 마리 용이 보였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다른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나타났다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푸른 소나무는 송악 사람으로 용 이름을 가진 자손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대왕 휘하에 시중(侍中)으로 있는 왕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지요.

또한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철원을 뜻합니다. 대왕께선 여기에서 일어났으나 결국 여기에서 망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닭(鷄)을 잡고 오리(鴨)를 치는 것은 왕건 시중이 신라를 공벌하고 나중에 압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궁예 왕이 시기하여 왕건을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신숭겸 · 배현경 · 복지겸 등이 일어나 부덕한 왕을 내쳤다. 그렇게 보면 고경문은 장군들의 마음을 얻게 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이 얘기의 말미에 세 번째 비결이 나타났다. 내용은 ‘무성무취진천강(無聲無臭震天降) 살마무종와룡패(殺魔無種臥龍牌)’였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신의 능력을 구사하는 성인이 내려와, 마귀를 죽이고 그 종자를 말린다. 성인은 품에 와룡패를 지녔다.

비결이 배포되자 힘없는 민초들의 관심은 ‘와룡패’에 있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해인사(海印寺)를 짓게 한 용왕이 주었다는 신기막측한 해인(海印)같은 것으로 풀이했다.

소문은 가지를 치며 와룡패의 신험함에 살점을 붙여 나갔다. 그것이 나타남으로써 일본제국은 낙조에 접어들었다는 풍설도 돌았다. 이제까지 비결 형식으로 뿌려진 것은 세 장이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컸다.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였다.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 참문(讖文)에 대해 논의하며 작설차 한 잔씩을 마신 후 모두 나동그라졌다. 독극에 중독된 것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와룡회 회원들은 자신들이 낯선 곳에 던져진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곳은 지하 토굴이었다. 중앙을 통로 삼아 마주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구조는 건너편에 수감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쇠종이 울었다. 그 소리의 여운을 타고 주문(呪文) 외는 듯한 기도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 것으로 본다면 이곳은 경찰서 유치장도 아니고 지하 고문실도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귀기(鬼氣)가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웅얼대는 소리에 접근하기 위해 윤사달은 벽쪽에 귀를 가져갔다. 생각대로 그것은 통성기도 소리였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여,

나는 당신의 아들 니니기 앞에서 다음 같은 사실을 밝힙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시야가 닿는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를 주셨습니다. 하늘이 벽처럼 닿아 있는 나라까지도 또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라까지도. 푸른 구름이 엷어져 마침내 없어져 버리고 마는 곳에 위치한 나라까지도. 그리고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는 먼 나라 역시 당신의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여,

당신은 수많은 배들이 쉼 없이 떠다니는 그 푸른 바다 저 너머까지도, 말들이 말발굽 소리 드높게 박차고 나아가는 험한 길, 그 너머까지도 당신의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위하여 좁다란 땅을 넓게, 비탈진 언덕을 평지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먼 곳에 있는 나라들을 하나의 끈으로 엮어 가까운 이웃이 되게 했습니다.

그와 같은 수고의 대가는 어느 날엔가 거둘 수 있으니 그날 당신 아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이 보는 가운데,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그 열매를 이용할 것입니다.

종교적인 기도문 같았으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이쪽저쪽으로 궁리했지만 어느 종단(宗團)의 기도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면담이 이뤄진 건 정오가 지나서였다. 지하 감옥에 있을 땐 따로따로 수감했지만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했다. 직사각형의 탁자에 마주보는 형태로 앉아 대화가 시작되자 턱밑에 염소수염이 돋은 삼십대 전반의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배포한 [격암가장결]을 눈여겨봤습니다. 비록 세 번뿐이었지만, 내용을 볼 때마다 여러분의 뛰어난 기지와 해학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소수염의 머릿속에 어떤 종류의 흉측한 계산이 들었는지를 알지 못한 상황에서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염소수염의 말이 무심하게 떨어졌다.

“여러분들은 중죄를 범했습니다. 우리 대 일본제국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겠다고 선전포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당연히 중죄로 다스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만, 향후 여러분의 결단 여하에 따라 평생을 감옥에서 썩느냐, 아니면 황국신민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느냐가 판가름 날것입니다.”

아직은 어떤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염소수염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의 말은 여유가 있었다.

“나는 오까모도(岡本)라고 합니다. 조선에 온 지 다섯 해가 지났으니 그런 대로 조선사람이 다 됐다고 봐야겠지요.”

염소수염은 무엇이건 직설적이었다.

“이곳은 산 속에 있는 수양관이니 마음 편히 가져도 좋소.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내가 여러분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은  바로 ｢경전(經典)｣을 만들라는 것이오.”

정한용이 뜻밖이라는 듯 반문했다.

“경전이라고요?”

“그렇소,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경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허련의 기색이 곱지 않았다.

“경전이라는 건 그 방면에 석학들이 모여 오랫동안 물 흐르듯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처럼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오. 선과 악의 대비(對比)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보편타당성이 있는 내용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그것이 어찌 하루이틀에 만들어지겠으며 몇 사람의 힘만으로 된다 보시오. 그건 어려운 일이오. 그러나저러나 하나 물어 봅시다. 도대체 무슨 경전을 만든다는 겁니까?”

염소수염은 흥미롭다는 듯 눈가에 웃음 조각을 띄워 보았다.

“신돕(神道)니다.”

“신도? 신도라면 일본 종교잖소? 그 종교의 경전을 조선 사람인 우리가 만들어요? 어허, 자다가 봉창을 긁어도 유분수지.”

염소수염은 허련의 밉살맞은 추궁도 여유작작 넘겼다.

“이 문제는 내일 상의합시다. 모두들 깊이 생각해 보시오.”

일행들은 다시 지하 토굴로 돌아왔다. 모두 한 곳에 있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대만에 있을 때 신도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선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답니다. 귀신 참배를 좋아하는 그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종교죠.”

이동운의 지적처럼 일본엔 많은 신사가 설립되어 있다. 신도들은 각자 집안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이 예배드리는 곳은 자신이 속해 있는 신사다. 그들은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한 신만은 빼놓지 않고 공을 들인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다.

“언젠가 스승님께선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일본에는 두 가지 형태의 신도가 있답니다. 신도의 창시자나 경전, 어떤 권위를 갖지 못한 상태다 보니 신도들 간에 믿음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거죠. 예를 들면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앞세워 그것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여기는 쪽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을 무시하고 신사나 제단에 참배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교파 신도’와 ‘신사 신도’로 나뉘어졌다는 겁니다.”

일행들의 머릿속엔 공통적으로 한 생각이 흘러갔다. 이곳은 분명 ‘교파 신도’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겐 경전이 필요했다. 허련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도리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