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신식 문물을 많이 접해서인지 이동운이 꺼내 놓은 의견은 획기적이었다.

“우리가 지어야할 [격암가장결]은 일종의 비결서(秘訣書) 형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과거와 현재 · 미래가 거의 같은 분량으로 약술되는 게 바람직해요.”

이것은 어떤 책자의 형식보다 한두 장 정도의 참언이나 비기를 풀어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여 민중 속을 파고들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재미였다.

그런 의미로 첫 번째 작업이 ｢오백년 기담(五百年奇談)｣의 재구성으로 사이사이마다 교묘하게 풀어놓은 비결(秘訣)의 배치였다. 이미 조선이 망한 상태에서 새롭게 다져가는 옛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향수에 젖게 했다. 아주 낯익은 얘기였다.

<한 소년이 집으로 가는 도중 샛길에서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처녀는 언제나 같은 시간이면 물을 길러 밖으로 나왔었다. 한두 번 마주치다 보니 이젠 하루라도 안보면 안 될 사이로 변했는데 어느 날 처녀는 편지 한 통을 은밀히 소년에게 전해 주었다. 편지에 써진 내용은,

‘잠상기유산(岑上豈有山) 호하경무천(昊下更無天) 액중반월횡(腋中半月橫) 목변양인개(木邊兩人開)’였다.

소년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겨우 그 뜻을 알아냈다. 즉, 산봉우리(岑) 위에 어찌 산이 있으랴 하니 그 산(山)을 빼면 금(今)만 남는다. 또 하늘(昊) 아래의 하늘(天)을 빼면 일(日)자가 되고, 액(腋)에서 달(月)을 빼면 야(夜)만 남고 목(木)에다 두 사람(人)을 넣으면 올래(來)가 된다. 오늘밤 만나자는 금일야래(今日夜來)이다.>

얘기의 말미에 [격암가장결]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비결이 배포되었다.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의 출현과 조선의 멸망이었다. ‘태신세임신을사운(太神勢壬申乙巳運) 오백이칠사시말(五百而七四始末)’이라는 참언이었다.

이것은 이성계가 임신년인 1392년에 조선의 태조로 등극했다가 1905년 을사 보호조약으로 망하기까지 오백년의 운이다. 또한 칠사(七四)는 7×4=28대 왕으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내용이 아닌 탓에 처음엔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던 일경(日警)은 이동운이 대만에 있을 때 스승으로부터 일러 받은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집어넣으면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두 번째 비결이 배포되면서였다.

즉, ‘도적자필선흉 반사비교 (盜賊者必先凶 半死匕交)였다. 이것은 도둑질하는 자는 먼저 망하고 차차 더욱 비참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에 대한 예문으로 일본의 연호 소화(昭和)를 배치했다.

이동운은 자신의 이름을 대만인 도부신인(桃符神人)으로 밝히고 다음처럼 풀어놓았다.

“소화(昭和)는 일도구(日刀口)로 나뉘어지니, 일본도재구(日本刀在口)다. 즉, 일본도를 입에 물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평화를 구해야 하는 필구화평(必求和平)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면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므로 고왈본필망(故曰本必亡)이다.”

당연히 소동해야 할 일경들과 조선 총독부가 뜻밖에 잠잠하자 비결서 제작에 탄력이 붙었다. 이동운의 어투는 패기에 찼다.

“어차피 시작한 일입니다. 어느 게임이건 승기를 잡았을 때가 중요해요. 이때를 우리 쪽에 유리하게 받아들이면 뜻있는 동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격암가장결]에 실린 세 번째는 ‘두 개의 얘기’였다.

첫째는 백제의 멸망을 다룬 ｢귀배문(龜背文)｣이었다. 백제 의자왕 말기에 각종 이상이 나라 안을 휩쓸었는데, 하루는 귀신 하나가 궁 안으로 들어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그러더니 귀신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팠더니 석 자 깊이에서 나타난 거북이 등에 괴이한 글귀가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왕은 무당을 불러 글 뜻을 물었다.

“둥근 달은 가득찬 것이니 점차 기울어지고 초승달은 차지 않았으니 점차 차게 됩니다. 신라가 장차 강성해 집니다.”

왕은 무당의 목을 쳐버렸다. 귀배문은 백제의 멸망을 예언한 거북이 등에 쓰인 글이다. 다음에는 고경문에 대한 야설(野說)이었다. 이것 역시 일본의 패망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다. 창근이라는 이는 시장에서 싸전을 운영하는 장사치다. 어느 날 가게에서 물건을 정리하는데, 머리에 치포관을 쓰고 거사복을 입은 사내가 거울을 내밀었다.

“이 거울을 사시오.”

창근은 엉겁결에 쌀을 주고 거울을 샀다. 벽에 걸어 놓은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글씨가 은은히 일어났다.

<하나님이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려보내 먼저 닭을 잡고 나중에 오리를 묶는다. 뱀해에 용이 둘 보이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 가운데 몸을 숨기고, 다른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어 기운이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쇠잔한 것 같기도 하다. 성함과 쇠함이 없어지면 티끌과 앙금을 미워하도다.>

도대체가 이상한 글귀였다. 창근은 이 글을 궁예에게 바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거사를 찾아라. 찾기만 하면 많은 상금을 내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