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엔 수많은 예언자와 도참서가 있습니다. 그중 믿음이 가는 예언자와 도참서는 이렇습니다.”

그가 내놓은 자료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어 있었다.

첫째 무학(無學). 고려 말엽의 승려로서 묘암존자라 한다. 이태조의 존신을 받고 국도 및 왕릉 선정에 참여하였다. 예언서에는 [무학연대록]과 [무학비전]이 있다.

둘째 의상(義相). 신라의 고승으로 도선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예언서에는 [의상결]과 [의상대사비결]이 있다.

셋째 정감(鄭勘). 고려 말엽의 인물로 혹자는 중국인이라고도 한다. 문답체의 풍수에 능하고 국운 성쇠의 예언 능력이 뛰어나다. 예언서에는 [정이문답]과 [감결]이 있다.

넷째 남사고(南師古). 조선 성종 때의 인물로 호는 격암, 또는 경암. 천문과 지리, 풍수와 복서 · 상법에 능했다. 명종 때에는 천문학 교수에 임명될 만큼 천기 보는 법이 독보적이다. [남사고참서]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 등의 예언서가 있다.

다섯째 정북창(鄭北窓). 조선 중종 때 인물로 원근법에 능했으며 피리와 가야금 음률에 뛰어났다. [정북창비결] [정북창동기] 등의 예언서가 있다.

여섯째 서산대사(西山大師). 석휴정 · 청허당 또는 서산이라 불렀다. 임진란 때 관군을 도와 공을 세운다. 비록으론 [서산대사비결]이 있다.

일곱째 두사총(杜師聰). 명나라 때의 인물. [두사총비결]이 있다.

여덟째 이서계(李西溪). 경주 사람으로 이름은 득윤이고 자는 극흠. 호가 서계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을 배우고 선조 때 왕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서계가장결]이 있다.

이외에도 본관을 밝히지 않은 이승(異僧)과 채동지(蔡冬至) · 정여립(鄭汝立), 허균(許筠) 등의 이름도 있었다. 자료로 활용될 서책이 좌중을 한바퀴 돌았다.

“보아서 아시겠지만 조선에도 예언에 능한 인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섬나라 놈들에게 왕실이 유린되고 강산은 초토화됐습니다. 경술년 국치는 이제 아득한 전설처럼 우리들의 기억 밖으로 멀어져 가니 어느 누가 조선의 운명을 되살리겠습니까?  감히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젠 우리가 나설 때라구요.”

누구 한 사람 반론이 없었다. 이동운은 준비해 둔 생각들을 비단 무늬처럼 펼쳐 냈다.

“시기가 어느 때인진 모르지만 계룡산 연천봉의 방백비는 일본인들이 가져다 놓았을 겁니다. 또한 여타 종교 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을 방치한 것도 우민 정책(愚民政策)의 하나로 봅니다. 무엇에든 감동을 잘 하고 세밀하지 못한 우리 민족의 단점을 이용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거죠. 이런 때 우리들이 일본인들의 계획을 역으로 찔러가자는 겁니다.”

이동운이 언제 대만에서 돌아와 개개인의 특성을 연구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서찰을 보내 국사당에 모이게 된 이들은 점복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곳에 모인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주역]에 능한 정한용이나 풍수지리술에 탁월한 김창원, 명리학의 허련, 상리학의 윤사달, 그리고 성명학엔 이동운…. 그러고보면 약속이나 한 듯 점복에 능한 역술인들이 모인 셈이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없었다. 이동운은 말했다.

“예언서와 기인 이사들의 행적을 볼 때 가장 신뢰가 가는 쪽은 남사고 선생입니다. 재주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방면에 걸친 걸 보면 우리가 짓는 비결서의 주인공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허련은 마뜩찮은 듯 혀끝을 찼다.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비결서를 짓는다지만 이미 세상을 버린 분의 존호를 사용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내 생각은 그렇소이다. 비기니 도참이니 하는 책들이 조선에만 있는 게 아니고 중국에도 있어요. 그러니 특정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승(異僧)’이나 ‘야차(夜叉)’라는 명칭으로 괴기스러움을 살리는 게 좋을 듯싶어요. 아니면 송나라 때 파자점으로 이름을 떨친 소강절의 점법서를 참조해 [황극책수]라 하든지….”

그 점에 대해 정한용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비기나 참서는 그 자체가 믿음이 덜 갑니다. 거기에다 지은이의 행적이 모호하고 이방 족속의 이름을 쓴다면 비결서의 가치가 반감될 게 뻔해요. 그런 점으로 본다면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감을 예언자로 나타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 의견 역시 금방 지워졌다. 정감은 고려 말엽의 인물로 민중 속으로 파고들려면 조선 때 인물이 제격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사고와 정북창으로 좁혀졌고, 결국 남사고로 낙착되었다.

“정북창은 역학에 뛰어났습니다만 예언가라기보다 피리와 가야금을 가까이 한 풍류가 쪽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남사고 선생은 동인과 서인이 각축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헤아리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함자를 빌려 비결서를 짓는다 해도 어느 누가 시비 걸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생각엔 그 분의 호를 따 [격암가장결(格庵家藏訣)]을 만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특별히 반론이 없고 보니 이동운의 의견을 따라갔다. 그의 회의 진행 방식은 일사천리였다.

“제가 귀국할 즈음 스승님께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차 일본을 고약하게 만들 비결서를 짓게 된다면 모임의 명칭을 ‘와룡회(臥龍會)’로 정하라고요. 촉한의 재상 제갈공명의 아호를 빌려 온 건 그 분의 심계원모를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 이유로 스승님께선 이렇게 패(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비취로 만든 패의 앞면엔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새겼고, 뒷면에는 흘림체로 용(龍) 자가 씌어 있었다. 이동운은 그것을 ‘와룡패’라 칭했다. 그날의 모임에서 윤사달은 와룡회의 리더로 뽑혀 상징적으로 와룡패를 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