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패(臥龍牌)

“그 사람, 지금 어딨는가?”

송학수는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앉게. 지난 시월 오죽헌에 들어가 이제 나왔으니 잠인들 제대로 잤겠는가. 지금 딸 아이 방에서 쉬고 있네.”

벽암은 어둑새벽, 박일우의 방문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멋대로 자란 수염과 퇴색한 머리칼. 상대를 꿰뚫을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은 야수의 안광처럼 번뜩였다. 그토록 강렬하고 타는 듯한 눈길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박일우는 말없이 한 통의 서찰을 떨구고 나갔다. 그것은 오죽 선생으로 불리는 윤사달의 젊은 날 행적이었다. 한 맺힌 자신의 행장(行狀)을 밀실(오죽헌)에 들어온 인연 있는 자에게 남기고 있었다. 기록을 읽은 벽암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날을 샜다. 그만큼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그러잖아도 자넬 만나면 얘길 해 줄 참이었네. 자세한 전말은  새벽에야 알았으니까. 스승님이 남긴 기록이니 티끌만한 거짓도 없을 것이네.”

송길주 역시 헛기침을 두어 번 뿌리고 나서 반 무릎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5십여 년 전의 먼지 낀 비밀의 문을, 해묵은 서찰이 열어가고 있었다.

오죽 윤사달이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선 것은 경오년(庚午年 ; 1930년) 8월 열닷새였다. 집집마다 추석 준비가 한창인 한가윗날, 인왕산 국사당(國師堂)으로 그를 부른 건 생면부지의 젊은이였다. 이미 그곳엔 아침 일찍 도착한 고암 정한용과 귀암 허련, 그리고 풍수사 김창원과 스물 대여섯으로 보이는 낯선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가 이른 시각이었지만 사당 안은 무척 침침했다.

“이 사람은 대만에서 [추배도(推背圖)] 연구로 이름을 떨친 이동운(李東雲) 선생입니다.”

풍수사 김창원의 짧은 설명에 그는 겸손해 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요.”

[추배도]는 원천강(袁天罡)과 이순풍(李淳風)이 공동으로 저술한 예언서다. 여름날 팥죽 끓듯 흥망성쇠가 조석지변이던 중국 왕조의 수수께끼를 다룬 [추배도]. 은어(隱語)에 묻혀 있던 비밀을 이동운이 밝혀내면서 ｢성명학(姓名學)의 재인(才人)｣으로 우뚝 등장했다.

[추배도]가 천 몇백년간 베일에 가린 채 내려온 것을 보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동운의 측자 · 파자법은 대만의 많은 연구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제가 귀국해 조선 땅을 돌아다녀보니 참으로 이상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조선 총독부에선 신작로와 철도 사업 명목으로 측량을 했는데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동운은 풍수적으로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점으로 본다면 동행했던 김창원의 입김을 받았다는 생각이었다. 얘기는 계속되었다.

“조선이 개국해 전도(奠都 ; 도읍을 정함)하려던 곳은 계룡산이었습니다. 장차 국도가 될 땅이라 하여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여타 종교가 들어오고 있는 곳이 신도안(新都內)이라는 건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신도안은 계룡산을 주산으로 삼아 논산군 두마면의 네 개 마을과 대전의 일부, 그리고 공주 땅 일부분을 포함한 동서북(東西北)으로 10리인 남면이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도선(道詵)이 비기를 쓸 때 ‘송도는 5백년으로 이씨가 나라를 탈취해 한양에 도읍한다. 한양은 4백년이고 정씨가 국권을 찬탈해 계룡에 축(築)한다’하여 [정감록] 신앙이 크게 민중의 삶 자락에 깔려 있었다. 이동운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민비는 자식을 얻기 위해 계룡산으로 여관(女官)을 보내 연천봉 위의 신령스런 샘에서 몸을 씻고 귀한 아들 낳기를 기원했습니다. 이왕구 전하가 탄생하자 매년 공양미 30석을 연천봉 가까이 세운 압정사(壓鄭寺 ; 정씨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운 절)에 보냈답니다. 나라의 기운을 견고케 하려는 방책이었어요.”

이러한 기원이 무자비하게 깨어진 게 경술년 국치였다.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이다.

“옛날부터 계룡산 연천봉에 방백비(方百碑)라는 게 있었습니다만 오가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비바람을 맞았습니다. 누가 언제 갖다 놓았는진 몰라도, 그곳에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심상찮다는 거죠. 이른바 ‘방백마각(方百馬角), 국혹화생(口或禾生)’이었어요.”

석면에 새겨진 참문의 뜻은 ｢광약유결｣과 다를 바 없어 이동운은 참문의 파자로 넘어갔다.

“본디 방(方)이란 사(四)를 뜻하고 마(馬)는 오(午)인데, 오는 팔십(八十)을 합한 잡니다. 각(角)은 뿔을 나타내는 것으로, 동물들은 보통 뿔이 두 갭니다. 그래서 이(二)죠. 다음으로 국혹(口或)은 합하면 나라 국(國)이 되고, 화생(禾生)은 합해 옮길 이(移 ; 이의 옛날 글자는 화생의 합자)가 됩니다. 이것은 파자법으로 ‘사백팔십이(四百八十二), 국이(國移)’니, 482년에 나라가 망한 경술년의 국치를 나타낸 겁니다.”

이 같은 파자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를 같이한 일행들을 놀라게 한 건 이동운의 주장이었다.

“지금 조선 산천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한일합방 다음해인 1911년에 호남선이 개통되고 여타 철도사업이 진행되면서 명당은 파헤쳐지고 대혈은 토막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우리라도 힘을 합해 저들의 음모를 분쇄해야 됩니다. 우리가 비결서를 지어 저들의 허점을 역으로 찌르자는 거죠.”

이동운은 손가방 안에서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내 놓았다. 그것은 예언가로서 이름을 날린 기인 이사와 도참서의 목록이었다. 그 중 자신이 추려 엮은 내용을 한쪽에 뽑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