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교든 그들 나름의 경전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종교(大倧敎)엔 [천부경]이 있듯 유대인에겐 [성경]이 인도엔 [불경]이 있다. 그러나 신도교는 별도의 경전이 없다.
그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건 [고사기]와 [일본서기]다. 그중 [고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하늘에 있던 최초의 신들은 이자나기라는 남신과 이자나미라는 여신을 탄생시켰는데 두 신이 섬나라 일본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사이에서 육지를 비롯해 산의 신, 나무의 신, 폭풍의 신, 불의 신이 태어나고 마지막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신이 아마또(大和) 가문의 시조라 믿는다. 이렇듯 허무맹랑한 기록이 신도의 경전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벽암이 근심스럽게 덧붙였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가 느껴지더구만. 남악을 찾아나선 일본 처녀의 행동도 그렇고. 또 그의 조부가 남겼다는 보물 지도라는 것도 그렇구. 더욱 흥미로운 건 히라다와 신도교들이 대거 입국한 그 다음 날, 전북에 있는 주말농장이 폐쇄됐거든. 왜 그랬을까, 폐쇄하지 않으면 안 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남묘호렝게교와 신도교. 둘 다 일본의 이방 종교란 점이 벽암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았다.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소담스러운 눈송이가 속진(俗塵)을 덮어 버리려는 듯 유리창 너머로 쉼 없이 떨어져내리는 게 한 폭의 설경화였다. 눈송이는 나비처럼 춤추며 저희들끼리 몸을 비비며 간지럼 탔다. 그것만 보고 있어도 잡다한 세속의 번거로움이 사라진 것일까. 한결 마음이 담담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송학수였다.

“이제껏 귀암(龜岩 ; 허련) 스승님의 행적을 찾아 조선팔도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 세월이 어느덧 5십년이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벽암이나 송길주가 모를 리 없었다.

“어려서부터 학비를 지원해 준 김순옥이라는 아이가 있었소. 지금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르뽀라이터로 활동하는 패기만만한 처녀죠.  월간지 논픽션 공모에 ｢멍텅구리 배｣라는 추적 기사가 당선됐는데 그 원고를 쓴 이가 바로 김순옥이에요. 그 아이의 부모는 민속학(民俗學) 연구에 독보적인 활동을 하다 실종된 김규환(金圭煥) · 신옥희(申玉姬) 씹니다. 부부가 실종된 것은 지난 67년 7월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화재가 발생했어요.”

부모의 실종과 화재는 어린 소녀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갔다. 일종의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인다는 안타까운 방송 보도를 접하자 송학수는 자신이 대부(代父)가 되어 양육하겠다고 나섰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내 처지를 잘 이해하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순옥이는 스승님의 행적을 찾기 위해 자청하고 나선 거요. 의심이 갈 만한 곳을 뒤지다가 마침내 스승의 행적을 찾아냈어요.”

그때가 1977년 8월 초순이었다. 우연히 국립도서관에 들른 그녀의 눈길이 특별한 책에 머물렀다. 충남 서산군 도원정사본(桃源精舍本)으로 1944년 충남 서산군 지곡면 도성리에 사는 전성후인(全城后人) 이도은(李桃隱)이 필사했다는 [격암유록]이었다.

“두 분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책은 격암 남사고 선생의 비결서입니다. 일찍이 신인을 만나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남사고 선생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은어(隱語)로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서책을 본 나는 반신반의할밖에요.”

임진왜란을 비롯해 병자호란 · 한일합방 · 남북 분단 · 6. 25동란 · 4. 19의거 · 5. 16혁명을 비롯해 근대사를 수놓았던 대단한 인물들과 사건 · 사고가 비단 속의 그림처럼 꼭꼭 숨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일본의 패망 · 중국의 분열 · 첨단 과학과 별들의 전쟁 · 종교 전쟁 등등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송학수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며칠 후 그 아이가 [신도경]이라는 두툼한 책을 들고 왔는데 그제야 나는 스승님의 실종이 [격암유록]과 관계 있다는 걸 깨달았네. 신도교의 경전이란 것이 [격암유록]을 교묘하게 옮겨 놓았으니 놀라움이 클밖에.”

스승의 실종이 신도교와 관계 있는 것이라 믿게 됐지만 문제는 어떻게 신도원에 침투하느냐였다. 여러모로 궁리하던 김순옥은 친구의 언니 김말순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신도교 사당동 지역 책임자인 일임(一壬)이었다.

“여러 경로로 수소문한 결과 스승님께선 신도원의 역경원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됐네.”

생사가 확인되자 선급한 문제는 어떻게 만나느냐였다. 우연히 ｢황극경세원｣을 찾아온 ｢스캔들｣ 잡지의 탁원제로 하여금 그곳을 방문케 했는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도원에 침투한 탁원제와 김순옥이 귀암을 만난 직후 지하 토굴에 갇혔다는 전갈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갇힌 토굴이었다. 집단으로 조성된 묘지를 파헤쳐 토굴(지하 감옥)로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장소라는 게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김말순의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곳엔 스승님뿐 아니라  실종된 여러 사람들의 행적이 보이더란 말일세. 음택 풍수의 대가 김창원(金昌元)을 비롯해 귀암 스승님, [주역]에 능통한 고암(孤岩) 정한용(鄭翰容), 민속학과 고전 · 이두에 조예가 깊은 김규환 · 신옥희 부부…. 다소 시간 차이는 있지만 구금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강유선씨….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여타 인물들의 실종이 신도교와 100프로 관계 있는가? 또 하나의 의혹은 실종된 인물이 살아 있다면 왜 외부와 연락을 지금까지 끊었는가?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을 꾸몄는가? 의문은 층층시하로 나를 괴롭혔네.”

송길주가 답답하다는 듯 상 위에 손사래를 쳤다.

“경찰에 고발하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도 했지. 사흘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질 못했네. 아니지, 애당초 찾을 수가 없었지. 그들은 이미 수사관들이 닥칠 걸 알고 있었으니까.”

“방법이 없단 말인가?”

“잠입 수사 역시 소득 없었네. 그들은 신도원에 들어오는 자의 신원을 훤히 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탁기자를 보낸 것인데 결과가 이렇듯 뒤틀렸네.”

송학수의 낯빛이 쓸쓸하게 변해 갔다.

“도대체 그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스승님이 실종된 그날로 되돌아가 생각해 봤네. 그날 스승님은 집을 나서면서 국사당(國師堂) 모임에 참석한다 했었거든. 일본인들이 폐쇄시킨 그곳에서 회합을 가진 건 아마 비밀 유지였을 것이네.”

“….”

“입암이 찾아와 그런 저런 얘길 했을 때도 특별한 생각이 없었네. 진역관으로 오려고 집을 나서기 전, 문득 파자점을 치려고  점목(占木)을 뽑아 드니 ‘도리 형(衡)’이야. 형 자는 행(行)과 어(魚)로 나뉘잖은가. 움직이는 물고기, 그래서 생각해 봤지. 오랫동안!

중국엔 용문이란 협곡이 있는데 그곳을 뛰어넘은 물고기는 용이 돼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네. 그러나 점액(點額 ; 물살에 휩쓸려 상처 입은 고기)된 놈들은 도마 위에 올려져 소금과 칼벼락을 맞게 되지.

도리 형 자를 뽑으면서 누군가 오죽헌에서 출관했다는 예감이 강하게 오더라구. 더구나 형 자를 뽑을 때 집(執) 자가 떨어졌으니 그 사람으로 인해 옳고 그름이 밝혀질 거란 확신이 섰네. 이곳으로 걸음을 재촉한 것은 그 때문이네.”

‘집’이라는 글자를 밟는 순간 탁원제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스캔들｣ 잡지의 취재부장 박일우가 그곳 어딘가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푸념을 들었다. 그러나 섬광처럼 스쳐간 예감은, 진역관에 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바로 오죽헌이라는 또 하나의 밀실이었다. 벽암이 술 한 잔을 벌컥 비우고 대소를 터뜨렸다.

“자네의 파자점은 과시 일품일세. 사위 녀석이 신새벽에 출관한 걸 어찌 알았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