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씬 무슨 일로 그곳을 찾습니까?”

“남악(南岳)이니까요.”

‘남악?’

벽암은 뜻밖이라는 듯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자에 들어와 신문 · 방송에서 일본인들의 전라도 관광을 귀 따갑도록 떠들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게이꼬라는 처녀도 남악에 대한 관심이 상당해 보였다.

“이 지돈 엉터린가 봐요.”

“?….”

“조부님께선 그랬거든요. 혼자 들어갈 자리는 이우봉(李牛峯)의 묏자리고 집단 취락지는 남악이라구요.”

우봉이라면 매국노 이완용의 아호다. 구한말 조선 총독부의 어용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이완용을 알고 있다면 그녀의 조부와 게이꼬는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오라, 이완용의 폐묘를 구경하러 왔군요.”

“어머, 어떻게 아세요?”

“나 역시 거길 돌아본 길이오.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기에 찾아갔더니 포탄 맞은 것처럼 패어 있으니 헛웃음만 나옵디다.”

“아저씬 풍수사예요?”

“한땐 그런 일을 했었소.”

게이꼬는 기쁜 표정으로 다가섰다.

“그럼, 남악이 어딘 줄 아시겠네요?”

“남악이라…. 북악이 있으니 어딘가에 남악이 있을 거로 생각되오만. 글쎄올시다, 날고 긴다는 풍수사들이 못 찾은 걸 보면 없는 지도 모르겠소.”

게이꼬는 낡은 지도의 중심부를 다시 짚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곳이 제비산이고, 동그라미 표시가 정여립의 생가요.”

“정여립?”

“그렇소.”

게이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부님께선 중심점이 남악이랬거든요. 이곳에 사람들이 취락하면 현명한 지도자를 얻을 수 있다고요. 그리구 이곳 어딘가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고도 했어요. 근데, 이곳이 정여립의 생가라고요?”

“남악과 보물이라. 그런 말이 나온 건 분명 무슨 근거가 있을 터인데. 조선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오. 사색 당파에 휩쓸리다 보니 상대를 치기 위해 별의별 음모가 나타나기 마련이었어요.

선조 대왕 때 수찬(修撰) 벼슬을 지낸 정여립도 당쟁의 희생물이 된 선비요. 역사의 이면에는 사덕(四德)을 고루 갖춘 선비라 평하지만, 역사의 전면엔 그가 반역 죄인으로 낙인찍혔어요.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나타난다는 도참사상을 앞세웠다는 죄명을 달았는데, 굳이 죄상이라는 걸 만들자면 풍수 설화일 것이오. 그가 야망을 키운 것은 조부가 묻힌 쌍용리 용암 마을 뒷산 묏자리 때문이지 아마. 그곳이 ‘제왕의 터’라는 소문은 오래 전에 돌았으니까.”

“제왕의 터라뇨?”

“풍수상 오공지혈(蜈蚣之穴 ; 지네의 혈)로 불리는 혈 자리요. 그곳에 묻히면 후손 가운데 왕이 될 자가 나온다는 자리요.”

“그럼 왕이 됐나요?”

“아니오. 반역 죄인으로 몰려 능지처참 당했소. 혈자리는 틀림없었지만 죽은 천룡(天龍 ; 지네)의 자리였으니까. 아가씨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그분의 생가가 그려져 있는 연율 모르겠소이다.”

벽암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손창하(孫彰河) 풍수와 답산했을 때 그곳은 제왕이 태어날 자리는 아니었다. 굳이 ‘제왕의 혈’을 꼽자면 용암 마을보다는 오공리(五公里 ; 전북 정읍군 산외면) 뒷산이 혈지로 적당했다. 창하산(蒼霞山) 지맥인 그 산은 분명 오공지혈이다. 그러나 산의 정기를 받은 걸출한 인물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지네 산과 오공리(蜈蚣里)란 마을 이름을 다른 글자로 바꿔 버렸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제왕의 혈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지네의 모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