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할 말 있습니까?”

김시우가 슬쩍 물러났다.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 나서야 약간 상체를 앞쪽으로 숙였다.

“

신도교엔 역술가들이 상당수 모여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들이 레이져 쑈를 하며 ‘교명고천제’를 올린 것은 단순히 종교적 행사만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근자에 전라도 쪽에서 차오르는 기운이 거칠기 때문에 예방한다는 차원의 뜻도 있었을 거구요.”

“전라도쪽 기운?”

“그렇습니다. 그쪽 지방의 소문엔 그렇습니다. 서울엔 북악이 있으니 전라도엔 남악이 있을 거랍니다. 어느 누구건 남악에 해당되는 땅을 산다면 일거에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풍문이 돈지 오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곳에 사람이 모여 촌락을 이루면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으로 탈바꿈 된다는 거죠. 당장은 아니더래두 머지않아 도청소재지가 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죠.”

마충길은 당치않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입니다. 어찌 수도가 함부로 바뀌겠습니까?”

“물론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미사일 공격의 사정권에 있는 서울 한복판이니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잖습니까. 북한 아이들이 오판이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큰일이 날 게 아닙니까.”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그 점이 마충길의 마음을 잠깐이나마 흔들어주었다. 멈칫거리는 사이에 김시우의 준비된 노림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말을 드려 어쩔지 모르겠습니다만, 머지않은 장래 전라도 출신의 대통령이 등장할 것을 역술가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악(南岳)이라는 말이 10. 26 사태 이후 흘러나오겠습니까. 제가 모시는 이회장님의 출생은 경상도 대굽니다. 야당 인사들과 교분이 있다 보니 얼마쯤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모양입니다만 대국적인 면에서 볼 때 정권이 그쪽으로 바뀐다면 그룹 전체가 데미지를 입을 게 뻔합니다.”

그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선결문제는 전라도 대통령의 출현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첫 단계로 용비어천가(新龍飛御天歌)를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뭘 만들어요?”

“마대령님, 하극상의 문제는 이미 벌어졌습니다. 군부가 일어났으니 어느 정도 카리스마적인 집정이 필요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민정 이양을 선언하고 돌아갈 수 없는 일이구요. 그걸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모종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 달라진 내일을 구현해내자는 과업이 용비어천가를 새롭게 짓는 일이죠.”

마충길은 전류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용비어천가를 새롭게 만든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모를 리 없다. 조선조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로부터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가 용비어천가다.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과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 또한 후대의 임금은 이렇듯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노래다. 또한 제왕의 등극엔 반드시 신이한 증험이 함께 했음을 노래했다. 마충길은 그 점을 의식했겠지만 슬쩍 방향을 틀었다.

“아직은 뭐라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결정 난다면 김상무님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요즘 같은 때는 기업도 줄을 잘 서야 살아남습니다. 마대령님이 힘써 주신다면 저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 한 번 더 봅시다.”

“오늘밤 저희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천천히 음미해 보시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보시면 전화를 주십시오.”

목례를 하고 김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미닫이문 밖으로 나가자 술상이 치워지며 개다리소반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선 이팔 남짓의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개다리소반을 위켠에 내려놓고 큰 절을 올렸다.

“김희정(金嬉晶)이에요.”

그녀는 가까이 다가앉아 술을 쳤다. 여느 요정과 마찬가지로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풍기는 기품은 달랐다. 장사꾼다운 능수능란한 서빙이 아니라 각별한 정성을 나타내려는 몸짓이었다. 겨우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마충길의 몸은 불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는 다짜고짜 희정이를 끌어당겨 키스를 퍼부었다.

마충길은 그녀의 가슴에 한 꺼풀의 비단천이 더 감겨있는 것을 보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휘감긴 비단천의 매듭에 닿자 김희정의 손바닥이 그 위로 덧씌워졌다.

“이곳에 손을 대면 평생을 보호하셔야 해요.”

“약속하지.”

몇 번이나 돌려 감은 비단천이 풀리자 안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 통장과 도장이었다. 마충길이 멈칫 물러앉았다.

“오늘밤 뫼실 분이니 저에게 부탁했었답니다.”

마충길은 통장을 집어 들었다. 액수는 5억 원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한동안 통장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쪽에 던져놓았다. 희정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비밀번호는 0259예요.”

구석진 밀실에서  화면에 떠오른 마충길의 움직임을 노려보며 김시우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먹잇감이 미끼를 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