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이날 박대통령 주변에는 세 가지 일이 심상치 않게 일어났다.
하나는 준공식에 참석하여 제막 테이프를 당겼을 때, 웬일인지 보자기가 반밖에 벗겨지지 않았다. 또 하나는 제막식을 마친 일행이 헬기를 타고 도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노루 두 마리가 헬기 소리에 놀라 죽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박대통령 일행이 청와대로 돌아올 때 헬기 3호가 가벼운 고장을 일으킨 일이었다.

이날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궁정동으로 돌아온 박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 18년의 막이 내리는 순간, 파자점을 치던 귀암의 머릿속에 얼핏 ‘박(朴)’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박의 운세는 점(卜)을 치면 십팔(十八) 년이라는 의미로 떨어진다. 귀암은 머릿속에 구르던 글자 한 자를 다시 집어냈다. 이번에는 인(仞)이었다. ‘사람’과 ‘칼날’. 어느 누군가가 또다시 칼날을 휘두르며 사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인가?

귀암은 잔뜩 이마를 찡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11월이 가고 12월이 왔다. 초순이 막 벗어나는 시점에서 10. 26 사건 당시 내란을 방조한 죄로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12. 12사건이다. 수도권에서 일어나는 긴급한 상황에 대해 즉각 병력을 투여할 수 있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특전단의 두 사령관도 부하들에게 체포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박대통령 사망 후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코자 통대회의(統代會議)에서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지난 12월 6일이었다. ‘과도적인 위기관리 정부’임을 내세웠지만 정국을 장악할 지도력과 통제력은 누가 보더라도 부족한 상태였다.

김시우(金豺雨)는 육원각 밀실 깊숙이 눌러앉아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스팟뉴스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시어머니처럼 채근하던 미우라의 성화를 적지 않게 언짢아했던 그였다.

“과도정부에선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니 지금 나서는 게 타이밍이오.”

사태 파악을 위해 좀 더 기다리는 것은 조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직은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하기 전이니 기름칠을 하려면 지금이 절호점이라는 분석이었다.

“오늘밤 육원각에서 만나자 했으니 거사의 실세인 그 자의 마음을 떠보시오.”

저녁 9시 30분이 되자 노크 소리와 함께 미닫이가 옆으로 물러나며 감색 양복을 입은 보통 체격의 사내가 들어섰다. 서른 대여섯으로 보기 힘들만큼 행동이며 기품에 중후함이 배어 있었다.  김시우의 건너편에 앉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밀어왔다.

“보안사 마대령(馬忠吉)이오. 나를 육원각(六園閣)으로 부른 이유가 뭡니까?”

김시우의 눈짓을 받은 접대부가 그의 잔에 술을 쳤다.

“전화상으로 말씀 드렸듯 저는 얼마 전 등기를 마친 주식회사 무극(無極)의 자금담당상무 김시웁니다.”

마충길은 훌쩍 술잔을 비우고 나서 상대에게 잔을 건넸다.

“무극, 무극이라…, 그 회사는 대도 그룹 이상철 회장의 방계회사지요? 이회장 그 사람 야당 쪽 인사들과 교류가 잦다는 소문이던데 우리 쪽에 다리를 놔보자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저희 그룹은 기업활동을 통해 증식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회장님 신조가 땀 흘려 모은 재산을 어렵고 힘든 자들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는 공동생활을 꿈꾸셨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희 그룹은 사회  사업에 종교 활동의 목적을 둔 무극교(無極敎)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재래종굡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고유의 종교에서 장점만을 뽑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그룹 차원에서 전 사원들이 모여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호국집회를 가지려는 것은 모두가…."

“아, 집회는 보류하셔야 될 겁니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지금 집회를 갖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전라북도 지역에 매란방 철학관에서 사회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회비를 내면 자동으로 회원에 가입되는데, 회원에겐 주말을 자연 속에서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제공받는다는 거죠. 그 클럽이 어떤 의도로 그와 같은 운동을 벌이는지 밝혀진 바 없습니다.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요. 지금으로선 명분이 뚜렷해도 집회를 허락할 수 없어요. 그건 그렇고…, 나를 보잔 이윤 뭡니까?”

“두 가집니다. 첫째는 새롭게 종교 활동을 하게 된 무극교가, 종교 활동을 통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과 둘짼 건강식품의 허갑니다.”

“쉬운 일은 아니군요. 특히 무극교를 지원해 달라는 것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 신도교라는 종교 단체에서 ‘교명고천제’를 올릴 때 레이저 쑈를 한 모양입니다. 그날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정계와 재계의 실력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레이저를 허공으로 쏘아올린 후 ‘봉황이 날아올랐다’고 한 것은 민심을 현혹시키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런 곳이야말로 일차 수사대상이죠. 이런 때 무극교를 지원하라는 것은 솔직히 무리가 따릅니다.”

“배려만 해주신다면 공동생활에서 축적되는 자금의 2분의 1을 매월 내놓겠습니다.”

“그래요? 그렇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저희가 자체 개발한 의약품을 건강식품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마충길은 마뜩찮은 듯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어떤 겁니까?”

한쪽에 놓아둔 봉투에서 김시우는 몇 가지 인쇄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마충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